밥에 뜸이 드는 시간이면 / 윤관영
괜히 뻘쭘해지면 주방으로 간다
바람이 병풍 문을 흔들어 대면 채 썰어 묵밥을 한다 앞니로 끊어 먹는다 햇살이 하도나 밝아 묵은 차양의 때마저 환하면 콩나물을 무쳐 막걸릿잔을 든다
이게 다 날씨 탓! 주방의 나도 사는 꾀 하나는 있어야 해서, 눈발 날리는 날, 눈발도 고조곤히 못 앉아 있는 날림일 때 돼지 껍데기를 볶아, 볶아도 맵게 볶아 소주를 붓는다 손에 닿는 곳에 있어야 친구고, 그래서 소주는 이미 근친 당신 탓은 아니고 비 오는 날엔 손님도 뜸하고 생각은 더 나고 그래서 자동으로 주방에 들어 괜히 준비해두었던, 올갱이국을 끓이고 그럴 땐 아욱을 넣는 사치마저 벌이고, 이땐 동동주가 좋고 이게 다 날씨 탓 내 몸 탓 이런 사치마저 없으면 어떻게 주방의 시절을 견디나,
주방 덕에 밝아진 귀는 고양이 발소리마저 밟아서는 안주를 덜어 쪽문으로 간다 주방 쪽문은 내가 세상을 내다보고 누군가를 기다리던 그 자리
괜한 자리,
뻘짓하는 그 자리
- 『오후 세 시의 주방 편지』, 시로여는세상, 2015.
* 술 중에 제일 좋은 술은? 낭만적인 당신이 ‘입술’을 부르고, 밤의 시간까지 계산하는 당신이 ‘낮술’을 꼽을 때 나는 (조금 뜸을 들였다가) ‘남이 사는 술’에 엄지를 내밀겠다. 그래도 나는 ‘세상에 공짜 없다’는 말을 믿는 편이다. 휘발되지 않는 부채의식이 저도 모르게 술을 술로 갚게 만들기도 하지 않겠나 싶은 거다.
내 맘 같은 남은 없거나 귀하다. 필요할 땐 더 없다. 비가 오거나 일에서 조금 놓여나서 마음 바닥도 투명하게 느껴질 즈음, 곁이 그립기도 할 것이고 공허한 것을 채우고 싶은 마음도 들 테다. 그때 안주 장만해서 “손에 닿는 곳”에 늘(늘은 아닐 수도 있지만) 있는 소주나 막걸리로 근친 맺고 동행하는 정도의 사치는 누릴 만하지 않나.
잠시 호강으로 순해진 시인은 고양이를 위해 아까운 안주를 양보하고, 괜한 “뻘짓”도 한단다. 남 보기에 조금 민망하기도 하고, 더러 바보 같기도 하고, 아주 쓸데없어 보이기도 한 그런 일이 뻘짓이다. 생업이 되지 못한 뻘짓이 오히려 삶을 견디게 하고 의미 있게 해주기도 한다. 모르긴 몰라도 시 쓰는 일도 그런 것일 테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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