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어부 / 최서림

톰소여와허크 2015. 7. 26. 02:10

 

박수근, 시장의 여인, 1960년대 작

 

어부

- 박수근 12  / 최서림

 

 

십 년 전 화진포에서도 보던 얼굴

보길도 어촌에서 만난다.

방금 끄집어 낸 다시마보다 더 춥게

젖어 살아온 인생,

힘들게 이 섬을 찾아온 것은

孤山이나 어부사시사가 아니라

함부로 들여다볼 수도 없는

다시마보다 더 억세게 뒤틀린 검은 얼굴 때문이다.

한때 열병처럼 휩쓸고 간 <민중>이니 민중시도 모르고 살아온 노인은

파도처럼 묵묵히, 다시마만 말리고 있을 뿐.

내 어머니의 無識처럼 조상들이

부용동에서 부역했던 것도 모르리라.

노인을 멸치새끼처럼 품어 온

자궁같이 둥글고 늙은 바다가

양식장 가득 찬 부표들로 숨이 차

헐떡거리고 있다.

안개로 멍멍해진 해안선모냥

등이 휘어버린 노인의 마음밭에

자잘한 근심들이 조약돌처럼

이리저리 쓸리고 있다.

 

- 『구멍』, (주)세계사, 2006.

 

 

* 박수근은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자기주장답게 회색빛의 질박한 색조로 서민들의 삶을 일관되게 그렸던 화가다. 마을과 시장, 그 사이를 잇는 길과 나무 그리고 바닥에 퍼질러 앉거나 행상하는 노인이나 아주머니를 잘도 그렸다.

반면에 윤선도는 출세와 은둔을 반복하며 “선비의 행장에는 때가 있는 것을 어찌하나”라며 마음을 달랬다. 귀양과 낙향은 있었어도 윤선도는 서민의 삶과는 분명 거리를 두고 있었다. 득의의 <어부사시사> 40 수를 남기지만 실제 생계를 위해 사투하는 어부의 땀과 눈물이 아니라 자연 속 유유자적하는 가짜 어부를 그렸다. 윤선도는 전란으로 어수선한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종가의 막대한 재력을 이용해서 보길도를 이상국으로 가꾼다. 대목과 일꾼을 동원해서 으리으리한 정자(세연정)를 짓고, 정원에 인공 연못을 조성한 뒤 배를 띄우고 거기서 선상 잔치를 연 것이다. 뭍에서 무희와 악공을 데려와 흥이 나면 어부사시사를 합창했던 그 호기를 비판하는 시각이 적지 않다.(물론, 부당한 것에 대해서는 할 말 하는 지식인이며, 당시에 크게 환영받지 못했던 한글로 수준 높은 작품을 완성한 점, 뛰어난 건축물과 문화유산을 남긴 점도 같이 평가해야 할 줄 안다.)

이 시에서 시인은 “다시마보다 더 춥게/ 젖어 살아온 인생”, “다시마보다 더 억세게 뒤틀린 검은 얼굴”에 깊은 연민을 갖고 있다. 생계의 현장인 바다마저 독점권을 가진 자본가에게 빼앗기거나, 고용되거나, 밀려나서 간신히 생업을 잇는 소외 계층에 대한 연민이다. “자잘한 근심들”로 “등이 휘어버린 노인”들은 시인이 목격한 현실이며, 박수근 그림의 주요 배경이기도 하다. 그러니 이 시는 윤선도보다 박수근에 밀착해 있는 자신의 시적 취향을 밝힌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보길도에 가서 세연정의 아름다움에 취하는 것도 좋지만, 그 아름다움의 이면에 대해서도 같이 생각해 보면 더욱 좋을 것이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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