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찰일지 5 / 한상철
2014년 1월 1일 정찰비행 중 우주본부로부터 수신된 공문 내용
<자전하는 모든 행성은 즉시 자전을 멈추고 정지할 것 특히 거기서 노래 부르거나 시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생명체는 모두 중범죄자로 우주 밖으로 추방할 예정임>
이에 태양계 주민은 자전하는 지구를 천왕성 뒤 어두운 곳으로 숨기려 했으나 이를 알고 화가 난 우주본부는 아예 태양계 전체를 없애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음 그러나 박용래 김관식 김종삼 천상병 등 지구로 파견됐거나 소풍갔다 돌아온 시인 몇 명이 본부 정문 앞에서 막걸리를 마시며 항의하고 일부는 크게 우는 등 소동이 일어 우주본부는 현재 이 계획을 보류 중임
추신 : 이 보고서는 극비사항이므로 지구인들에게는 철저히 보안을 유지할 것
- 『가난한 습성』, 북인, 2015.
* 울보 박용래, 홍은동 전설 김관식, 민간인 김종삼, 손바닥 인사 천상병이라니! 자의든 타의든 하나같이 현실 질서로부터 벗어나 기행을 일삼고 문제적으로 가난하거나 유치하거나 찬란했으며 예외 없이 술을 파고들었으며 썩 괜찮은 시를 남겼다.
시인이 공개한 정찰일지에 의하면 이들이 태양계와 지구를 구하기 위해 실력 행사에 나섰다는 것이다. 한 명 한 명의 무게도 만만찮은데 네 명이 한 목소리를 내니 우주본부에서도 꽤나 시끄러웠겠다. (독수리 5형제, 꾸러기 5형제처럼 다섯을 채울 거라면, 나중에 합류할 한 명에 대해서 논의해 보는 것도 재미나지 싶다).
그런데, 정작 “우주 밖으로 추방”해야 할 것은 애매한 명단을 내보내서 험한 분위기를 만들고, 공공연하게 이야기되는 “극비사항”을 저만 모르는 “우주본부”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여기엔 우주본부가 답해야겠지만 답을 들을 것 같지는 않다.
우리의 영웅들은 막걸리 마실 삥만 뜯으면 한동안 잠수할 게 분명하다.(이동훈)
'감상글(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비는 내 육신의 거처다 / 조두섭 (0) | 2015.09.12 |
---|---|
사이프러스 / 최서림 (0) | 2015.09.08 |
나는 나에게로 돌아간다 / 신현림 (0) | 2015.08.31 |
고운사 풍경 / 김용락 (0) | 2015.08.26 |
회전 식탁 / 김해자 (0) | 2015.08.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