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사이프러스 / 최서림

톰소여와허크 2015. 9. 8. 09:06

고흐, 사이프러스 나무가 있는 길, 1890.

 

 

사이프러스 / 최서림

 

 

그의 그림은 모두 자신의 자화상이다

해바라기도 생 레미의 포플러도 보리밭 둑의 사이프러스도

한쪽 귀를 잘라버린 얼굴의 눈빛처럼

노랗게 질린 하늘과 해처럼 빙글빙글 타오른다

 

고흐처럼 늘 주머니가 텅 비어 있는

술병도 의식도 멍하니 텅 빈 이름 없는 화가

오래 감지 않아 불꽃머리가 된 사내가

며칠간 <사이프러스> 앞을 서성이다가

신발을 벗어둔 채

퀭하니 광기만 남은 그를 만나러

사이프러스 속으로 들어가 숨어버렸다

해 저무는 광활한 대지에 씨 뿌리는 사람과 더불어

씨를 뿌리며 살고 있다

불꽃처럼 이글이글 타오르는 밀밭을 등지고서

 

귀를 자르듯이

그의 그림을 가만히 잘라보면

소용돌이치는 피가 비릿하게 쏟아져나온다

하늘보다 투명하고 해보다 뜨거운 노란 피가

 

- 『버들치』,문학동네, 2014.

 

 

  * 고흐의 그림이 “모두 자신의 자화상”이란 말은 작품 하나하나에 그의 영혼이 담겨있다는 상찬이나 진배없다. 이번 시집에 고흐 관련 시가 대여섯 편 눈에 띄는 것도 “노랗게 격발시키는 눈빛”(<고흐처럼>에서)에 감전된 날들을 어떤 식으로든 풀어놓은 것일 테다.

  특히, 시인이 주목하고 있는 사이프러스는 더 유난하게 고흐의 체취를 느끼게 해준다. 알랭 드 보통도 『여행의 기술』에서“오스카 와일드는 휘슬러가 안개를 그리기 전에 런던에는 안개가 없었다는 말을 했다. 마찬가지로 반 고흐가 사이프러스를 그리기 전에 프로방스에는 사이프러스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고 말할 수도 있다”는 인상적인 말을 남긴 바 있다. 회오리바람에 든 듯 아래에서 위로 “빙글빙글 타오르는” 사이프러스 모습에서 고흐의 정신 발작이나 광기를 연결시키기도 하지만, 그의 지극히 이성적인 편지 내용을 보면 사이프러스에서 남이 보지 못한 것을 발견하고 그걸 색채로 표현하기 위해서 고심했던 흔적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시란 것도 내면의 “소용돌이”를 자신만의 터치로 밖으로 쏟아내는 것일 텐데 고흐만큼 못할 바엔 차라리 그의 그림에 들어서 자족하거나 귀양 살거나 하는 것도 한 방편이겠다. 알맞춤한 노란 피로 한 획의 문장을 얻고 나서야 유배에서 풀려날 텐데 그 기약 없는 날들을 견디는 것도 만만찮은 일이다.(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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