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에게로 돌아간다 / 신현림
그때 책이 가득 든 가방이 있었고
낙서판 같은 탁자마다 술이 넘쳐흘렀네
괜찮은 사내며 계집이며
가까워질수록 잃을까 불안한 심정이며
시대가 혼란스럽고 취직이 힘들수록
쟁기처럼 단단해져야 할 마음이며
[아침이슬]과 미칠 듯이 파고드는 러시아 민요
[검은 눈동자]를 들으며 몸 저리게 서러웠네
세월의 징검돌을 밟고
그들은 내 곁을 스쳐가면서
다시 칠 년 다시
소독약보다 지독한 시간이여
청춘의 횃불이 꺼져간다
괴로워야 할 치욕도 상처의 저수지도 잊어가고
우리의 숙명인 열정도 식어간다
근근이 살아가는 고달픔이란,
너는 허기져 삽살개를 찹쌀개로 헛발음하고
시계 사준다는 말이 나는 시체 사준다는 말로 들리고
혼자가 싫어 드라큐라도 함께 있고픈 주말
사나운 날씨를 못 견뎌 헤매는 오후 네시
울지 않으려고 웃으면서
나는 나에게로 돌아간다
- 『세기말 블루스』, (주)창작과비평사, 1996.
* 시인이 노래하는 세기말이나 이십 여 년 지난 지금이나 젊은이들이 마주하는 벽과 그로 인한 고뇌는 여전해 보인다. 이전 시대의 운동에 대한 열정 - 분단에 대한 저항, 군사 독재와 독점․매판자본에 대한 저항과 연대 등 - 은 희미해졌지만 진로와 취업에 대한 고민과 내일을 기대할 수 없는 불안이 젊음을 잠식하고 있다.
취업을 위한 책이 갈수록 두툼해질수록 시와 소설은 뒷전이 되어가고, 인문교양은 강사들이 다이어트해서 제공하는 걸로 소비되어 나간다. 자신과 세계에 대해 깊이 고민할 시간 없이 현실이 주는 압박감에 “쟁기처럼 단단해”지거나 적당히 포기하는 여유를 갖지 못한다면 다 실패자가 되는 거다.
세기말을 훌쩍 지나온 장년도 패기를 잊긴 마찬가지다. 어쩌면 젊음의 안간힘일 수도 있는 “치욕”도 “상처”도 그저 데면데면해지고, “열정”이 빠져나간 몸은 헛헛할 뿐이다. 울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오후 네 시에 서 있던 시인은 세기말을 지나고 또 그로부터 얼마간 더 지나서 안녕할까. “나는 나에게로 돌아간다”고 마지막 주문을 외었으니 바깥의 시선에 연연하지 않고, 바깥의 시간을 따라가지 않고 자신만의 [아침이슬]을 빚고 있을 줄 안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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