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의 / 장문석
누구나 말을 달려 말을 부리지만
누구나 훌륭한 마의가 되는 것은 아니다
무릇 말의 성정(性情)이란 매우 섬세하고 예민한 것이어서
일기 불순하거나 음식이 거칠면
요망한 바람이 되어 세상을 전횡하기도 하고
더러는 해독할 수 없는 워낭 소리로 우쭐대다가
길모퉁이마다 험한 발톱 자국을 남기기도 하느니
그리하여 진정한 말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천지운행의 진맥을 짚어 그 병세의 유무를 살핀 다음
병세가 있으면 침과 뜸으로 기혈을 다스려
날숨과 들숨을 우주에 연결할 줄 아는
비술을 익혀야만 하는 것이리라
그러면 비로소 말과 마의는 주종의 관계를 넘어
진정한 형용의 일심동체가 되었다 일컫는 것이니
그 경지래야 모래바람 흩날리는 사막 한가운데에
천의무봉의 오아시스를 양각할 수 있는 것이라
보았는가, 지금도 찢어진 의서의 한쪽에 전하는
난치의 세상을 구휼하기 위해 천하를 주유했다는
이미 전설이 되어 버린 무림 명마의 화상을
오호라, 그런데도 어쩌자고 그대는
진맥 한번 제대로 하지 않은 비루먹은 말의 잔등을 몰아
감히 세상과 일합(一合)을 겨루려 하는가
- 『꽃 찾으러 간다』, 실천문학사, 2014.
* 소설 ‘봉순이 언니’에 인용된 소년과 종마 이야기가 떠오른다. 아파서 땀을 흘리는 종마를 두고 소년이 시원한 물을 몇 번이나 먹이며 치료했지만, 종마는 상태가 더 나빠졌다는 것이다. 찬물이 말에게 치명적인 줄 몰랐던 소년에게, 할아버지가 “얘야,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아는 것이란다.”라고 말하는 삽화다.
마의(말의 질병을 치료하는 잡직) 혹은 말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말에 대해서 공부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말의 성정을 익히고 침과 뜸을 배우며 적재적소에 놓을 줄 알아야 한다. 앞의 소년은 말을 사랑만 했지, 말을 다룰 줄은 몰랐다. 소년이 얻은 거라면, 말을 사랑하는 만큼 자신의 실수로부터 더 크게 깨달을 거라는 점이다.
시인도 어쩌면 그 소년을 지나왔을 것이다. 말을 부리는 마의가 되었어도, 그가 꿈꾸는 경지는 더 멀리 있다. 말과 주종 관계를 뛰어넘어 일심동체하는, 그래서 마의이자 명마이기도 한 그의 꿈은 진행형이다. 물론, 시인이 말하는 말(馬)은 거지반 말(言)이기도 하다.
“ 비루먹은 말”로 “세상과 일합을 겨루려 하는” 그 자세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 해도 마의는 또 시인은 전혀 누추하지 않다. 로시난테와 함께 풍차로 돌진하는 돈키호테의 무모함이야말로 거대한 세계를 흔드는 낭만적 힘이 될 것이고, 운만 좋다면 그 사이 빛살처럼 터져나가는 말의 갈기도 잡을 수 있으니 말이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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