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채송화 피는 집 / 박경조

톰소여와허크 2015. 11. 20. 11:41

채송화 피는 집 / 박경조

 

고칠 것이 너무 많은

녹슨 빌딩 그림자 낮아지는 한나절

중간 정산된 퇴직금 들고 하루 몇 번씩

재개발지역 아파트 길 찾아다니고 있는

나를 보았어

나도 한 번쯤 마이다스 손의 신기루 꿈꾼 건 아닐까

어떤 날은 사다리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꿈꾸며 뒤척인 날도 있었다

 

그래도 가끔은

세상일과 상관없이 멀찍이 서 있고 싶어

 

툭 털고 일어나 걷는 내 구두굽 소리 따라

어린 채송화 모종 위로 봄비 내리던

담장 낮은 마을로 돌아온 그날부터

작은 꽃잎에 기댄 채 살아가고 있다는 걸 알았다

 

매직아이 같은 작은집 뜰에서

아침마다

겹송이 꽃잎 양산처럼 펼쳐들고

훔쳐보는 하늘이란……

 

- 『밥 한 봉지』, 시와에세이, 2008.

 

 

  * 집값이 터무니없이 상승하는 동안, 전문 투기꾼은 말할 것도 없겠지만 평범한 직장인도 재개발 지역이나 목 좋은 곳에 주택을 얻거나, 분양권을 받고 팔면서 자신의 연봉 이상의 시세 차익을 얻기도 한다. 은행 빚을 무리하게 얻어서라도 투자한 사람이 난 사람이 되고, 알뜰하게 살림한 사람은 답답한 사람 취급받는 이상한 기류가 없지 않은 것이다.

  그러는 중에 웬만한 아파트 가격은 억, 소리 절로 나와 쳐다보지도 못할 지경이다. 시인 역시 이런 분위기에 나 몰라라 할 수 없어서 발품을 팔아 “재개발지역 아파트 길”을 헤매 다녔을 법한데, 우연히 “담장 낮은” 집 마당에 핀 채송화 모종을 보고 친밀감 이상의 감정을 갖게 된다. 세상일이 높은 데만 눈을 주고 허방 짚는 아슬함에도 다투어 사다리로 몰려드는 거라면 자신은 그런 세상일에 놓여나 낮은 곳에서 “작은 꽃잎” 에 마음 주고 그 꽃잎에 기대어 살고 싶다는 마음이었음을 돌아보게 된 것이다.

  시인의 선택이 어땠는지 알 수 없으나, 자본과 이익과 남의 시선에 걷잡을 수 없이 휘말리기 쉬운 이즈음에 한 번쯤 브레이크를 걸고 자신과 주변을 돌아보는 마음자리가 청량하게 느껴진다. 봄비 맞는 채송화 기분이 꼭 그럴 것이다.(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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