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코올램프가 켜져 있는 비커 속 개구리 / 김사람
자고 일어나면 방이 점점 작아졌다. 아무도 그 진리를 몰랐다. 당시 내게 있어 진리란 그 누구도 모르는 비밀에 다름 아니었다. 그렇다면 나는 알고 있었는지에 대해 누군가 묻는다면 적어도 내 몸이 커지고 있는 것 같았다는 것에 대해서만은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사실을 모르는 것으로 했다. 왜냐하면 적어도 나는 시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외쳤다. 나의 길에 레드카펫을 깔라! 위풍당당 문을 열고 입장했다. 일곱 개의 방마다 아내들이 잠을 잤거나 다른 짓을 하고 있었다. 첫 번째 방, 옆으로 누운 아내의 허리를 뒤에서 안으니 내 손을 뿌리쳤다. 민망한 마음에 한참을 그대로 누웠다가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는 방을 빠져나왔다. 두 번째 방, 아기를 재우는 아내. 세 번째 방, 가계부를 쓰는 아내. 네 번째 방, 밀린 직장 일을 하는 아내. 다섯 번째 방, 인터넷 쇼핑을 하는 아내. 여섯 번째 ...방, 윗몸일으키기를 하는 아내. 일곱 번째 방, 자위를 하는 아내. 모두 거부당했다. 아무리 삼류라도, 시인인데. 거실에서 나와 방 끝까지 레드카펫이 깔려 있었다. 나의 방으로 퇴장해 화병을 만졌다. 뜨거웠다. 화병의 분꽃은 제 죽음을 알고 있을까. 나는 몸을 최대한 움츠린 채 눈을 감았다 떴다. 방이 없어졌다. 나는 어디에 있는가!
- 『나는 이미 한 생을 잘못 살았다』, ㈜천년의시작, 2015.
* 가마솥 개구리는 물이 서서히 데워지면 저 죽는 줄도 모르고 까무룩 있다가 최후를 맞이한단다.(실제는 그렇지 않다는 말도 있다). 무기력하게 있다가 화를 자초하는 세상일의 비유로 종종 쓰이는 말이다. 비커 속 개구리는 기구가 갖는 물질성에다 속이 투명하게 보인다는 점에서 조금 더 차가운 느낌이긴 하다.
화자이자 시인이기도 한 “나”는 “레드카펫”의 주인공이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소외된 존재다. 자신의 몸이나 자아는 커가는 데 비해서 세계로 확장되어야 할 자신의 방은 점점 작아지고 있다. 게다가 가까이 이어진 다른 방과의 소통에도 어려움을 겪는다. 일곱 개의 방으로 상징되는 평범한 일상으로부터도 단절되어 있는 것이다. 가장 가까워야 할 아내로부터도 인정받지 못하는 모습은 금홍이의 연인이었던 이상을 떠올리게 한다. 이상은 세상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아, 어둔 골방에서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날개』)다. 천재 시인(물론, 당대의 평가는 그리 우호적이지 않았다)과 삼류(?) 시인이 포개지는 지점에서 이상은 바깥세상을 향해 “한 번만 더 날자”고 외친 반면에, 시인은 자신의 방마저 잃은 상태에서 존재의 정체성을 묻고 있다.
“비커 속 개구리”에 어찌할 수 없는 존재의 무력감과 그에 대한 반동을 느꼈다면, 시인의 골방에 놓인 “화병의 분꽃”은 자신을 사르다가 간 모든 예술가의 자화상을 생각나게 한다. 설령, 개구리가 비커를 깨고 나온들, 분꽃의 없는 뿌리가 새로 생긴들 영원을 살 수 없는 시한부 인생이긴 마찬가지다. 남이 알아주든 그렇지 않든 주어진 시간 안에 나름의 꽃을 피워야 한다는 각성이 슬프게 밀려온다. (이동훈)
'감상글(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문주란 / 안재찬 (0) | 2015.12.13 |
---|---|
너는 아느냐 / 채형복 (0) | 2015.12.07 |
삼짇날 / 남재만 (0) | 2015.11.30 |
마의 / 장문석 (0) | 2015.11.26 |
채송화 피는 집 / 박경조 (0) | 2015.11.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