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젖은 외투를 어루만지다 / 변홍철

톰소여와허크 2015. 12. 21. 09:03

 

 

젖은 외투를 어루만지다 / 변홍철

 

비가 오네, 중얼거리는데

아내가 반쯤 자불며 하는 말,

엊저녁 비 맞고 들어온 거 기억 안 나요?

흠뻑 젖어 들어와 놓구선

 

더듬더듬 불을 켜자

문득 빗소리 멀어지고

 

바닥에 널부러진 외투에

아, 아직 마르지 않은

검은 물기!

 

입동(立冬) 지나 차가운 빗속을 너는

어디 혼자 헤매다 왔느냐

취한 몸 먼저 보내고

차라리 혼자 비틀대다 쓰러졌느냐

 

나무들 발등마다 찬 비에 베어

남은 이파리 몇

고개 저으며 떨어지는데

 

버리고 온 슬픔이 자꾸 안쓰러워

젖은 외투만 어루만지다

울먹이는 외투만 어루만지다

 

- 『어린 왕자, 후쿠시마 이후』 , 한티재, 2012.

 

 

  * 제어되지 않는 자본은 부의 독점을 가속화시킬 뿐만 아니라, 권력을 움직이거나 스스로 권력이 되어 노동을 착취하거나 생태를 훼손시킬 우려가 크다. 여기에 위기의식을 느끼고 노동 운동도 하고 생태 운동도 할 텐데 이 두 운동은 노동 그 자체, 생명 그 자체를 중시한다는 점에서 순수성이 있고, 갈수록 자본에 맞서기가 쉽지 않다는 점에서 절박성을 띤다. 이 순수와 절박은 실천으로 이어지는 밑천이 되기도 할 것이다.

  운동의 순수성과 절박성 그리고 실천은 시인에게도 바로 대응된다. “강인한 의지의 껍질을 가지고 안으로 삭힌 서정의 속살”(이하석)이 이 시에서도 고스란히 느껴지는 것이다.

  술로 필름이 끊긴 날, “취한 몸”은 어찌어찌해서 왔지만, 집에 들이지 못한 “버리고 온 슬픔”에 시인은 마음이 쓰인다. 그 슬픔은 추위에 떨며 “비틀대다 쓰러졌”거나 “고개 저으며 떨어지는” 어떤 상황과 관련이 깊다. 물론, 지극히 사적인 문제가 발단이 되었을 수도 있겠지만, 거대한 자본 논리나 사회 문제로 인해 소외되고 고립된 자신 혹은 이웃의 처지가 술을 푸게 한 빌미가 되었을 개연성이 높다.

  세상과 불화하고 세상과 대결하려는 운동가들의 초심은 이 시에서 보듯이 “슬픔”과 “젖은 외투”를 어루만지는 순수와 서정임을 알겠다. 여기에 절박성이 더하여 “우울의 시대를 깨뜨릴 사발통문으로서의 시”(이성혁)로 나아가기도 할 것이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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