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자화상 / 허정

톰소여와허크 2015. 12. 31. 10:06

 

고흐, 자화상1889

 

 

자화상 / 허정

 

빈센트 이용원*에서

이발사인 반 고흐가 등 뒤에 서서 묻는다

어떻게 잘라 드릴까요

고흐는 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어떻게 그려 드릴까요, 라고 들렸다

붓이 아닌 가위를 든 고흐에게 섬뜩한 주문을 한다

적당히 잘라 주세요

아니 잘 그려 주세요

가위와 칼자루를 쥐고 있는 그에게 머리와 목을 맡긴 채

애써 태연한 척하는 거울 속 내 모습을 본다

그리고 곁눈질로 고흐의 일그러진 모습을 슬쩍 보고

이발의자에 앉아있는 더욱 일그러진 고흐도 본다

드디어 면도칼을 든 고흐가 내 한쪽 귀를 싹둑 잘랐을 때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는 잘려진 귀를 손에 쥐고 있는

고흐의 모습을 거울을 통해서 내가 본다

 

* 빈센트 이용원 : 창원에 있는 이용원 상호.

 

- 『중고인간』, 오감도, 2015.

 

 

* 고흐가 고갱을 노란 집으로 반가이 맞았으나, 둘은 서로를 견디지 못한다. 다툼 끝에 고흐가 제 귀를 스스로 자르니 둘은 같이 비명을 지르며 이별했겠다.

귀에 붕대를 한 고흐의 자화상엔 비명과 광기를 지나온, 불안한 고요가 고여 있다. 이발사는 그런 고흐의 팬이었나 보다. 이발사에게 “머리와 목을 맡긴” 화자도 어느 순간 고흐가 되어 간다. 화자는 “적당히”, “잘”을 주문했지만 이것보다 애매한 말도 없다. 무엇보다 고흐는 “적당히” 살지 않았고, “잘” 살지 못했다. 생전에 그림 한 점 팔지 못한 고흐지만 예술적 자존심은 꺾이지 않았으니, 고갱이든 누구에게든 존중받지 못한 자신을 참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그의 잘린 귀는 자기애와 자기 실망으로 한껏 달아오른, 상처 입거나 “일그러진” 자아의 증표다. 또한 그 상처가 예술의 지경을 넓힌 것도 부인하기 어렵다.

고흐는 잘린 귀를 종이로 싸서 거리의 여자에게 건네주고 위로받기를 원했지만, 시인은 그 귀를 받아든 상태로 끝이 난다. 그 자체로 인상적인 정경이지만 자화상이 어떻게 완성될지 알 수 없는 대목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미 시작된 강렬한 붓질이 멈출 것 같지는 않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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