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봄밤 / 류경무

톰소여와허크 2016. 4. 3. 09:48




봄밤 / 류경무


당신 생각나기는 할까

뭐니뭐니해도 그 봄밤


노릇하게 데워진 바람의 무릎이

세상 모든 창을 타넘는 봄밤


당신 이 언약 알기나 할까

막 뛰어내리고 싶은 망루에 서서


가끔 당신을 읽다가

가끔 당신을 덮다가


나 아직 한 번도 가지지 못한 당신

내 코끝을 지나갈 때


당신을 넘기는 내 손가락

자꾸 바스러지던


점점 녹슬어가던 봄밤


-『양이나 말처럼』, (주)문학동네, 2015.



* 봄밤에 봄밤을 읽는다.

봄밤은 “눈썹이 하얘지도록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다”(송찬호)가 “칠칠치 못한 목련같이 나도 시부적시부적 떨어나졌으면 싶은”(김사인) 밤, “이웃들의 봄밤이 어리석게도 궁금해”(고희림)지는 밤이기도 하다.

류 시인이 깔아놓은 봄밤은 투명한 덫이다. 허방을 디디고 가다가 덫에 치여서 꼼짝부득인 밤이다. “코끝을 지나”는 당신을 분석하려고 덩달아 킁킁거리지만 당신의 실체는 밤바람처럼 스칠 뿐이다. 망루는 당신과의 언약이 있던 곳인가. 그 언약이 그렇게 높거나 아슬한 것이었나. 끝내 망루에 남은 것은 나인가 당신인가. 당신을 열심히 읽어도 온전히 알 수 없는 당신이지만 이 골몰이 봄밤을 데우지 않나. 읽어야 할 당신은 저만치 있는데 “당신을 넘기는 내 손가락”이 바스러지는 것을 봐야 하다니, 녹슬어가는 이 봄밤은 다시 미끈해질 수 있나. 먼 데 있는 당신은 안녕한가.

봄밤에 당신을 읽는다. 내가 당신을 읽고, 다른 누가 나를 읽고, 또 시를 읽고, 시를 앓고 그러는 중에 무릎걸음으로 오는 모든 것들에 술 한 잔 먹여서 비척걸음으로 내보내고 싶은, 그런 봄밤이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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