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처방전 / 고영서
아프리카에 다녀왔다는 수녀님 이야기다
밀림지역에서 봉사를 하다보면
말라리아는 수도 없이 걸린다는데
한국의 수녀들은 말라리아가 도지면
우리나라 라면을 약으로 생각하고
끓여 먹는단다
밍밍한 그곳 음식만 먹다가
매운맛에 땀을 뻘뻘 흘리고 나면
감기조차 뚝, 떨어졌다는 것
한 번은
에이즈 환자였던 센터의 현지 직원이
거의 죽음을 맞을 때
지금 뭘 해주면 가장 좋겠느냐 물었는데
감고 있던 눈을 뜨며
“코리안 수프!”
딱 두 개 남아있던 라면 중 하나를 꺼내어
끓여주었다는데
절반을 맛나게 먹고는 마지막 숨을
거두더라는 것
기력이 쇠해 병(病)조차 이길 수 없는
아이들에게는
약 대신 양손에 쥐어주었다는
달걀 두 개
한 끼 식량으로는 모자라
우리에게는 간식거리에 지나지 않는
라면과 달걀뿐인 식탁에서 오늘도
성호를 긋는 사람들
- 『우는 화살』, 애지, 2014.
* 독감이 유행이다. 고열과 함께 사나흘 세게 앓는 경우가 적지 않단다. 독한 녀석이긴 해도 말라리아에 비하면 가벼운 증상이기도 하겠다. 아프리카 현지에서는 말라리아보다 더 무서운 게 영양 결핍으로 인한 폐병이나 합병증이란다. 자신의 독감도 심각하게 여겨야겠지만 남의 중병을 더 걱정하는 마음이 있어 지구는 지금까지 돌아가는 중이다.
자기를 위하고 자기의 쓸모를 높이려 의욕을 갖는 사람들도 훌륭하지만, 그렇게 형성된 마음과 쓸모를 갖고 남을 돕기 위해 베푸는 사람이야말로 더욱 훌륭하다고 하겠는데, 아프리카의 굶주린 사람이나 전쟁으로 인한 난민들을 도우려는 사람들이 꼭 그런 사람일 것이다.
봉사활동 중에 말라리아에 걸린 수녀가 약 대신 라면을 처방하거나, “기력이 쇠해 병(病)조차 이길 수 없는 / 아이들”에게 약 대신 달걀을 처방하는 것은 열악한 현지 사정과 그 안에 스민 따스한 정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작은 것에 감사하는 마음까지 다 배울 일이지만 처방전은 새로 써야 되지 않을까 싶다.
고 이태석 신부는 전쟁이 끝나는 게 우선이라고 했다. 제대로 된 처방은 전쟁 비용을 줄이고 최소한의 의료, 교육, 생계를 책임지는 복지에 있을 것이다. 주말에 라면이 당겨서 한번 먹어볼까 고민하는 정도의 복지를 지구공동체가 같이 누리는 게 뭐 때문에 이리 어려운 건가.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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