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머나먼 술집 / 류근

톰소여와허크 2016. 5. 9. 18:01

 

머나먼 술집 / 류근

 

 

요 몇 달 사이에 나는 피해서 돌아가야 할

술집이 두 군데 더 늘었다

없던 술버릇이 하나씩 늘어날 때마다

갈 수 없는 술집들도 하나씩 늘어난다

그저께는 친하게 지내오던 사채업자와 싸우고

어젯밤엔 학원 강사 하는 시인과 싸우고

오늘은 술병 때문에 일요일 하루를

낑낑 앓는 일에 다 바친다

억울하다 갈 수 없는 술집이 늘어날 때마다

없던 술버릇이 늘어날 때마다

그래도 다시 화해해야 할 사람들이 늘어날 때마다

나는 또 술 생각이 난다 맨 정신일 때

저항하지 못하는 것은 내 선량한 자존심

하지만 그들은 왜 하필 술 마실 때에만

인생을 가르치려는 것인가 술자리에서만

별안간 인생이 생각나는 것인가

억울하다 술 마실 때에만 불쑥 자라나는 인생이여

술에서 풀려나면 다시 모른 체 껴안고 살아버려야 할

적이여 술집이여 그 모든 안팎의 상처들이여

갈 수 없는 술집이 늘어날 때마다

나는 또 술 생각이 난다 슬슬

피해서 돌아가고 싶어진다

 

- 『상처적 체질』, 문학과지성사, 2010.

 

 

  * 술 이야기에 단골로 떠오르는 시인이 꽤나 많다. 울 건수를 그예 만들어 콧물 눈물 찍어 내고 마는 박용래 시인, 구멍가게의 소주병을 몰래 털기도 했던 김종삼 시인, 술을 끊으려 술 주전자를 우그렸다가 다시 폈다는 김관식 시인, 만나는 사람마다 손을 내밀어 술값을 삥뜯었다는 천상병 시인, 새벽 전화를 자주 했다는 박영근 시인 등등, 이들의 술버릇은 시대와의 불화에서도 기인한 바 있을 것이고 남과 다른 기질적 성향(시집 제목이 ‘상처적 체질’이기도 하다)이 이를 더욱 눈에 띄게 만들었을 것이다.

  류근 시인의 술버릇을 알지 못하지만 인용된 시를 보건대, 술집에서 “인생을 가르치려는” 사람 앞에 고분하지 않을뿐더러 나아가 싸움까지 주저하지 않는 모습이 연상된다. 깨고 나면 후회하고, 깨고 나면 화해의 제스처를 고민하면서도 이런 불편한 일이 자꾸 생긴다는 것이다. 다 같이 가난하지도 않고 다들 똑똑한 것도 아니라서 사는 게 차이가 지니 술자리에서만큼 평등하면 좋지 않은가. 시인은 그렇지 않은 듯한 분위기나 권위에 대해서 좋게 넘어갈 생각이 없나 보다. 목소리를 내는 사람도 그에 반발하는 사람도 다들 술기운 빌려 말하는 건 마찬가지다.

  한 발짝 물러나서 보면, 술집에서의 일은, 너나 할 것 없이 “그 모든 안팎의 상처들"로 이해할 수도 있다. 술에 취하든 술에서 풀려나든 껴안고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이란 것을 느낄 때 즈음이면 술이 싱거워질지도 모르겠다.

  술 주전자를 모신 채 인생에 대해서, 상처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도 자기 안의 것을 속 시원히 풀지 못하고 오히려 속만 쓰리기 십상이다. 그래도 다시 술이다. “슬슬” 피해서 돌아가고 싶다는 시인의 말이 곧이곧대로 들리지 않고 “술술” 그 자리로 찾아간다는 말로 들리는 것은 분명, 알콜 후유증만은 아닐 것이다.(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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