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수갑산 / 윤중목
나는야 오늘 낮에 책방엘 갔었네.
나흘 동안 꼬박 밤새워 번 돈
18만 5천원을 몽땅 털어서
이 코너 저 코너 휘젓고 다니며
책, 책을 샀네, 숫제 반항적으로 샀네.
도합 16권이었네.
그 흔한 만 원짜리 한 장이 아쉬워
새 책을 사본 지가 어언 9개월.
돈 없어 밥 굶는 설움만큼은 아닐 테지만
돈 없어 책 굶는 설움도 보통이 아니란 걸
질겅질겅 씹어온 지난 내 9개월이었네.
중년의 허리춤에 둥지를 튼 이 몹쓸 궁핍이
얼마를 더 길게 갈지 가늠이 안 되거늘,
당장 또 며칠 내로 내야 할 이번 달 월세도
어디 가서 구해야 할지 묘책이 안 서거늘,
에라이, 배짱 좋게 호사 한번 부려봤네.
내일이면 헉-헉-헉- 삼수갑산을 갈망정
오늘 나는 허-허-허- 산천 구경을 갔었네.
산천보다 그윽하게 우거진 책방엘 갔었네.
-『밥격』, 천년의시작, 2015.
* 삼수와 갑산은 함경도 개마고원 일대의 오지다. 지형과 일기가 험해서 유배지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들어가기도 어렵고 나오기는 더 어려운 곳으로 인식되어 ‘아주 험한 지경’을 당했을 때 삼수갑산이란 말을 즐겨 차용했을 것이다.
시인은 내일 “삼수갑산을 갈망정” 오늘 “책방”에서 책을 사겠단다. “숫제 반항적”으로 나서기는 했지만 “몹쓸 궁핍”을 잊은 것 같지도 않고, 여유와 호기를 한껏 부리는 것 같지도 않다. 오직, 밥에 대한 절실함만큼이나 “책 굶는 설움”이 유난할 뿐이다.
책에 대한 사랑이 이만한 것에 대해서 부러운 느낌도 있다. “밥값에 매겨진 0의 개수로/ 제발 나의 인간자격을 논하지 마라”는 표제시 ‘밥격’에서도 확인했듯이 격이 느껴진다. 가난을 지나오며 밥을 섬기되, 밥에 매이지 않는 정신을 어쩌면, 책이 키워주었는지 모른다.
소월은 스스로 삼수갑산에 갇힌 듯했고 백석은 실제 삼수갑산에 갇히기도 했지만 시인은 허-허-허-, 삼수갑산 위를 나는 듯한 웃음을 지녔다.
문득, 평안도 정주를 지나, 함경도 삼수갑산에 가고 싶다. 그곳에 헌책방이 남아있다면 밥때 잊고 다닐 텐데.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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