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풍경 사진 / 이하석
길은
사랑이 무르익기 전까진
집을 가르쳐주지 않는 이 같습니다.
끊임없이 구불거리며, 나타납니다.
전혀, 막다르지 않습니다.
나는 굴참나무 아래서
죽음 쪽으로 떠밀려간 이들의
외길을 짚습니다.
누가 주춤거리며 돌아보고
누가 재촉하는 게
잔광 속에 찍혀 있습니다.
어떻게 남겨진 사랑이 긁어댄 풍경인가요?
풍경의 헤진 언저리에 우거진
어둠을 좀 더 밝게 인화하면,
행방불명으로 도드라지는 이름들과
아버지의, 되돌아 나오지 못한 막다른 길이 보입니다.
- 『천둥의 뿌리』, 한티재, 2016.
* 정지창 선생이 시집 발문에서 “죽음을 생각하고 호출하는 방법”이라고 했듯이 이 시집은 6.25 직후의 집단적 죽음을 환기하며, 죽음에 애써 무연했던 사람들의 정신도 함께 호출한다.
죽음의 배경은 대구에서 시작되어, 경남 지역으로 또 한강 이남으로 퍼지고 제주 4.3에 영향을 미쳤던 10월 항쟁에 뿌리가 닿아 있다. 1946년 10월 항쟁은 친일 관리 등용 문제, 토지 개혁과 식량 정책에 불만을 가진 일부 좌익과 다수의 민간인이 미군정과 행정당국에 맞서면서 발생한 사건으로 요약되지만 이후의 수많은 죽음을 예비하고 있었다. 군경이 소요의 책임을 물어 다수의 민간인을 이념 전향자를 위한 보도연맹에 반강제 가입시킨 후, 6.25 직후 재소자와 함께 이들 보도연맹원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기에 이른 것이다. 시인은 그 장면을 이렇게 떠올린다.
“대구 형무소에 갇힌 양심수들과 국민보도연맹원들은/ 구석 없는 광장에서/ 귀를 막지만,/ 죽음의/ 호명으로, 마구,/끄집어 올려집니다./ 한데 엮인 채/ 녹색의 차에 올라,/ 바리바리,/ 경산 코발트 폐광산에 실려 옵니다./(중략)/군인이/ 앞의 한 명을 쏘아/ 갱 속으로 떨어뜨리자 한데/ 엮인 이들/ 줄줄이/ 산 채로/ 따라서 내립니다/ 숨 막힌 미래 속으로/ 셀 수 없는/ 몸들몸들몸들 붉게/ 쏟아져 내립니다.”(‘컨테이너’ 중에서)
경산 코발트 광장의 유골이 어떻게 해서 발견되었는지 그 과정을 받아 적은 대목이다. 이외에도 가창골과 학산 등 대구 인근 지역의 학살 터를 찾아서 시인은 그들이 너무 오래 어둠에 있었음을 생각하고, “그래, 그래,/ 새벽의 어둠이 우릴 피워 올리기 위해/ 마구 수런거리겠지./ 마침내 너끈히 세계의 상공에/ 꽃들 뽑아 올려질 거야”(‘불멸의 노래’ 중에서)라며 이들의 죽음이 재평가되고 위로받기를 바란다.
위 시는 어쩌면, 시인에게 이런 작업을 가능케 한 사진 한 장을 소재로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사진 속 길의 끝에서 되살아오는 풍경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사람이 사람에게 총검을 겨누고, 구렁에 떨어진 사람이 악착같이 “긁어댄” 손자국 같은 것이었을까. 아니면 그렇게 아버지를 잃은 어린 자식의 가슴에 남은, 누군가 아프게 “긁어댄” 내면 풍경을 떠올리게 했을 수도 있겠다. “남겨진 사랑”은 죽은 자와 살아남은 자에게 공히 남겨진 아픈 사랑이다. 전쟁 상황임을 내세워 죽음을 명한 자와 그 명령을 충실히 따른 자의 편안을 위해 오랫동안 어둠에만 있는 사랑이었으니, 이제 좀 더 밝은 곳으로 내밀어 상처를 치유해가는 씻김굿의 장이 마련되면 좋을 것이다.
시인은 “죽음의 기억은 집 나온 길 같다”(‘또한 죽음의 기억은’ 중에서)고도 했다. “막다른 길”에서 다시 돌아오려면 기척이 있어야 할 줄 안다. “살아남은 이들이/ 사랑으로 밝아오지 않는 언저리로, 끊임없이, 기척이”(‘기척’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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