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生)은 아물지 않는다 / 이산하
평지의 꽃
느긋하게 피고
벼랑의 꽃
쫓기듯
늘
먼저 핀다
어느 생이든
내 마음은
늘 먼저 베인다
베인 자리
아물면, 내가 다시 벤다
- 『천둥 같은 그리움으로』, 문학동네, 1999.
* 이산하 시인은 제주 4.3을 다룬 ‘한라산’(1987)으로 필화사건을 겪는다. 그 후유증으로 절필 후 산사 기행과 방랑을 일삼는다. 아마도 몸과 영혼을 치유하는 과정이기도 했을 것이다. 현재는 작품 활동과 언론활동을 의욕적으로 병행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시에서 언급된 “벼랑의 꽃”은 대개 야위었으면서도 근육질의 단단한 기운이 서려 있다. 악착같이 바위를 비집고 뿌리를 내려야 산다. 칼바람에 가지 하나 허투루 키울 수 없다. 나중을 장담하지 못하니 기회가 있으면 꽃을 피워내야 하지만 그 꽃이 오래가지는 못할 것이다.
시인은 자신을 벼랑의 꽃으로 인식한다. 늘 먼저 피고, 늘 먼저 베이는 쪽이란 거다. 애초에 선택한 삶도 아니고, 이 삶에 자족할 이유는 더욱 없겠지만 시인은 벼랑의 삶을 자기화한다. 곁가지도 올리고 헛꽃이라도 피우고 싶은 마음의 싹을 번번이 베는 것이다. 무수히 “베인 자리”에 상처가 “아물면”, 스스로 “내가 다시 벤다”는 자기 선언을 분명히 한다. 평지에서 적당히 사는 삶이 아닌, 벼랑을 존재의 뿌리로 받아들이고 자기 육체와 자기 영혼을 가난하게 또 대차게 벼리는 삶이고 싶다는 거다. 이처럼 스스로 껴안은 벼랑 의식이 서늘하다.
필화사건을 소재로 글을 쓰고 있는 채형복 시인은 필화사건을 겪은 시인들의 변절을 소개하기도 했는데 이산하 시인은 줄곧 일관된 모습을 보였다고 슬쩍 편들어준다. 스스로를 벼랑에 두고, 벼랑에서 안락의 불빛을 좇아 내리고 싶은 유혹을 견딘 보상일 것이지만 밟으면 터지는 지뢰 같은 유혹이 삶의 도처에 놓여있을 줄 안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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