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http://cafe.daum.net/gaetuel/Tibl/282?q=%B9%E9%BC%BC%B0%A2
다락이 있는 풍경 /이동훈
다락의 목록은 간단하다. 앞자락이 뜯긴 비키니 옷장 하나, 그 안에 요긴하진 않으나 버리기는 뭐한 유행 지난 헌 옷가지들. 옆구리 터진 라면 박스, 그 밑에 다시 읽을 것 같지 않은 바둑 입문이나 권법 수련 책, 그 위에 개근상 삐져나온 졸업 앨범에다 권수가 안 맞는 무협지 몇 권. 철제 책상의 아귀 틀어진 서랍, 그 안에 이제 연락을 끊은 사람들의 편지까지.
다락의 목록을 추가한다. 어둠을 방해하지 않을 만큼의 작은 창, 그 창을 통해 보이는 건넛집 불빛에 얼씬하는 그림자, 그로 인해 놀게 되는 가슴. 베개를 꺾어 가슴에 괴고 엎드릴 때 머리카락에 닿는 서늘한 장판, 등을 대고 돌아누울 때 창밖으로 지나는 높쌘구름, 볼을 적시던 눈물 한 줄기, 기척 없이 있어야 들리는 쥐 발자국 소리까지.
나무계단 위 공중에 잇대어 달아놓은 높고 외로운 자리, 백세각*에 와 다락의 목록에 꿈을 적는다. 불운한 시대와 맞서려는 더워진 말들이 문풍지에 남아 울 때 요람처럼 아늑하고 시래기처럼 존득한, 저녁놀 타고 붉게 번져가기도 하고, 마법 양탄자처럼 하늘을 날아가기도 하는, 지금은 잃어버린 그 꿈을, 다락이 있는 풍경이 조금씩 흔들어주고 있다.
*백세각: 경북 성주군 초전면 고산리 소재. 여기 다락방에서 독립운동을 논의했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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