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류의 빛깔(세르게이 파라자노프, 1968년 작)
‘석류의 빛깔’은 아르메니아 시인 ‘사야트 노바’(영화의 원제목이기도 함)의 시와 삶을 영화화한 것이다. 인상적 장면 위주의 순차적 서사가 아니라, 그냥 장면 장면의 그림과 상징을 통해서 다양한 의미를 상상하게 한다.
굳이 서사라면 유년 시절, 궁정시인 시절, 수도사 시절 그리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막간 처리가 있다는 정도다. 생략된 서사에다 상징 자체가 원뜻과 표현된 것이 일대일로 대응하는 것이 아닌 만큼 독자 깜냥의 해석의 여지가 있다. 그래서 오류의 가능성이 높은 메모 몇 개를 남겨두고자 한다.
영화 내내 좌우로 흔들리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책장이 바람결에 넘어가는 장면부터 해서 시계추를 잡고, 공을 잡고, 말을 타고 심지어 천사까지 이쪽저쪽 옮겨 다닌다. 삶 자체가 끊임없이 헤매는 것임을 암시하는 거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는 <파우스트> 구절에 생각이 미치지만 구체적 서사가 없으니 혼란스럽긴 하다. 막연하지만 성(性과) 신(神)에 대한 예속과 이탈과 자유를 느낀다. 석류를 저마다 탐하는 것은 이성에 대한 집착과 황홀로 본다면 찌꺼기만 남은 석류를 통해서 그로부터 깨어나는 순간의 낭패감도 생각해볼 수 있다. 종교 지도자의 죽음 이후 양들이 몰려드는 장면은 신에 대한 경배로 볼 수 있을지 의문이다. 양을 제물로 올려두고 신을 경배하는 그림에 익숙해 있다면 더욱 그렇다. 양의 자리에 사람이 가 있고, 사람 자리에 양이 있으니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고민이다. 교회 첨탑이 부서지는 장면도 있지만 그런 불경을 통해서 더 신에게 다가서려는 몸짓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영화 속 얼마 되지 않는 삽입 목소리는 “내게 있어 삶과 영혼은 고문이다”로 시작되어, “내가 살든 죽든 내 노래는 사람들을 깨울 것이다”로 끝난다. 삶과 영혼이 바닥까지 내려간 뒤에야 다른 이의 영혼을 깨울 수 있는 시가 가능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는 수도승과 유년의 시인이 사다리를 내려가는 대목에서 번득 든 생각이다. 위로 오르려고 하는 데서 자신이 꿈꾸는 것, 그걸 사랑이라고 부르든, 신이라고 부르든, 시라고 부르든 간에 그러한 것은 더욱 멀어지기만 할 뿐이란 나름의 인식이 생긴다. 바닥 또한 바로 구원일 리는 없다. 좌우로 좀 더 흔들리며 바닥의 풍파를 겪고 그 바닥의 평정심까지 배워야 하는 아득한 길일 것이다. 다만, 고문까지는 아니길 바라는 마음이다.
아르메니아의 역사와 풍속, 감독과 시인의 생애와 작품을 살필 기회가 있으면, ‘석류의 빛깔’에 대해 또 다른 이야기를 하게 될지 모르겠지만, 오늘의 메모는 요기까지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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