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부의 아침 / 전선용
어머니는 마부입니다
마방의 하루는 새벽같이 시작되는데
터진 말발굽을 집기 위해 재봉틀부터 돌립니다
바늘귀에 잘 들어가지 않는 실 끄트머리를 엄지 검지로 비비다가
틀니로 조근조곤 씹어봅니다
“달가닥 달가닥”
마방에 가둬둔 한 필의 말이 방바닥을 뛰기 시작합니다
이 말은 몽골 들판을 누비던 노새
고삐 풀린 말발굽 소리가 찬송가처럼 들리기도 하고
경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이런 날은 마부가 기분 좋은 날입니다
때로는 마방에 말을 가두고 며칠씩 있을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마방에서 말 냄새가 짙지만
몸이 귀찮을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마부가 말을 다스리는 일은 피곤한 일이라서
웬만하면 한두 필 말만 풉니다
“우짜꼬 우짜꼬”
몇 필의 말을 부리던 노쇠한 마부는 티브이 채널을 몇 바퀴 돌리다가
다시 아침잠에 빠집니다.
- 『뭔 말인지 알제』, 도서출판 움, 2017
- 고단한 마부의 삶에서 실제 ‘마부’ 그림(전선택, 1955) 한 장이 떠올랐다. 그림은 일을 기다리는 허름한 사내와 지쳐 보이는 말이 서로를 흘끔 보는 듯한 장면을 담고 있다. 이 그림이 생각난 것은 마부라는 제목에 이끌려서도 그렇겠지만, 시인의 이름과 화가의 이름이 비슷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시인이 화가 못지않게 그림을 잘 그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서다. 이런 발견이 무지 즐겁지만 실제 시 내용은 ‘마부’가 아니라 쉬이 몸이 피곤해지고 전에 없이 아침잠이 는 ‘어머니’의 삶에 초점이 있다.
일찍이 정지용 시인이 「향수」에서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라며 바람 소리를 말이 달리는 형상으로 표현한 바 있는데, 전선용 시인은 재봉틀 돌아가는 소리를 또 그와 같이 말이 달리는 형세로 표현했다. 둘 다 “고삐 풀린 말발굽 소리”도 나고 힝힝거리는 콧김도 느껴지는 감각적 표현이지만 뒤에 소리는 초반의 기세를 오래 유지하지는 못할 듯하다. “노쇠한 마부”와 보조를 맞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시인은 첫줄부터 어머니가 곧 마부라고 밝히며 다른 상상의 여지를 줄이는 대신 어머니의 삶이 더 핍진하게 드러나게끔 한다. 찬송가 같기도 하고 불경 같기도 하고, 노래 같기도 하고 탄식 같기도 한 어머니의 허밍 속에는 자식의 복을 기원하는 마음이 적잖을 것이며, “우짜꼬 우짜꼬”라는 독경(獨經)은 근심이 끊이지 않는 세상일에 대한 무한한 연민의 마음인 동시에 어떻든지 일의 실마리를 찾았으면 하는 어머니의 기도이기도 할 것이다.
감상 글을 여기서 마쳐도 좋을 것이나 잠시, “말을 다스리는 일”만 떼어놓고 보면, 이건 시인의 일이기도 하다. 노쇠한 마부가 노련한 장인으로 읽히는 대목이다. ‘마부’를 그린 전선택 화가가 그림을 필생의 업이라도 표현한 바 있는데, 말을 다스리는 일에도 그와 같은 정성이 있어야 ‘나는 한 필의 말을 가졌다’고 겨우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이게 무슨 말이냐고 묻는다면 그냥, 시인의 시집 제목을 밀겠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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