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 위에서 / 이용악
바람이 거센 밤이면
몇 번이고 꺼지는 네모난 장명등을
궤짝 밟고 서서 몇 번이고 새로 밝힐 때
누나는
별 많은 밤이 되어 무섭다고 했다
국숫집 찾아가는 다리 위에서
문득 그리워지는
누나도 나도 어려선 국숫집 아이
단오도 설도 아닌 풀벌레 우는 가을철
단 하루
아버지의 제삿날만 일을 쉬고
어른처럼 곡을 했다.
- 『오랑캐꽃』,어문각,1947.
* 이용악 시인은 국경 근처 두만강에서 남동쪽으로 떨어진 함경도 경성 출신이다. 「국경의 밤」(1925년)으로 시인에게 상당한 충격을 주었던 김동환 시인이 동향의 선배다. 이용악이 「국경의 밤」에 몹시 끌린 이유 중에 하나는 시 내용이 자신의 가족사와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1920, 30년대, 자작농이 무너지고 소작이 떼이기도 하면서 남쪽으로부터 살 길을 찾아서 두만강 건너 북으로 향하는 유이민의 수가 급증했다. 이런 변화를 타고 국경을 넘나들며 현지인과 개척민 사이 장사를 통해 이문을 남기려는 상인이 있고, 그걸 노리는 마적의 횡행과 더러 군자금을 대려는 독립군의 모의가 있고, 국경 수비대의 단속이 있는 생사를 건 삶의 현장에서, “소금실이 밀수출(密輸出) 마차를 띄워 놓고/ 밤새가며 속 태우는”(「국경의 밤」중) 집안이 바로 이용악의 가계였다.
시인은 “아버지도 어머니도/ 젊어서 한창 땐/ 우라지오로 다니는 밀수꾼// 눈보라에 숨어 국경을 넘나들 때/ 어머니의 등골에 파묻힌 나는/ 모든 가난한 사람들의 젖먹이와 다름없이/ 얼마나 성가스런 짐짝이었을까”(「우리의 거리」중)라며 회고한 바 있지만 결국, 짐을 부리듯 5남매와 홀어머니를 남기고 시인의 아버지는 길에서 죽고 만다. 누군가의 연락을 받고 아버지의 시신을 수습하는 장면은 시인의 머리에 각인되어 언제든 재생되는 불도장 같은 게 아니었을까. 시인은 이 장면을 뭉클하면서도 인상적인 시 한 편으로 남겨둔다.
“우리는 머리맡에 엎디어/ 있는 대로의 울음을 다아 울었고/ 아버지의 침상(寢牀) 없는 최후의 밤은/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중)고.
「다리 위에서」에 나오는 “풀벌레 우는 가을철”에서도 이전의 풀벌레 소리가 다시 살아난 느낌을 받는다. 『선생님과 함께 읽는 이용악』을 쓴 박일환 선생은 “어린 남매는 무서움에 떨다 다리 위까지 어머니를 마중 나갑니다. 어려서부터 궁핍을 운명처럼 여겨야 했던 자신들의 처지가 얼마나 서러웠을까요”라고 메모를 남긴다. 제삿날을 앞두고 귀가하고 있을 어머니를 남매가 마중 나가는 장면으로 읽은 거다.
국숫집은 남편을 여읜 어머니가 삶의 방편으로 삼았던 일 중의 하나다. 어머니는 한몸에 두 몫을 하느라 단오도 설도 쉬지 못한다. “누나도 나도” 궤짝을 받치고야 겨우 등을 켜는 어린 나이지만 일손이 달릴 때는 국숫집 일을 거들기도 했을 것이고 자연스레 국숫집 아이로 통하기도 했을 것이다. 팔고 남은 국수 면발은 허기진 입에 달기도 했을 것이지만 뚝뚝 끊어지는, 근기 없는 국숫발 같은 삶을 좀처럼 벗어나지 못했다. 동경으로 서울로 유학하던 시절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대개 고학생 신분이었다. 여름엔 한뎃잠을, 겨울엔 “잉크병 얼어드는 이러한 밤”(「그리움」중)에서 보듯 불기도 없는 방에서 가난을 견디는 게 일이었다.
곤고한 가난 속에서도 마음만은 북쪽 고향 마을로 달린다. 그 마음이 “국숫집 찾아가는 다리 위에서” 잠시 머물렀을 수도 있겠다. 다리 밑으로 흐르는 강물엔 유년의 얼굴이 비치고, 아버지가 비치고 어디선가 풀벌레 소리도 들린다. 또한 어머니가 비치고 어머니가 건진 국수에 입을 벌리는 자신의 얼굴이 비치었다가 흐려지기도 한다. 다리가 과거와 현재를 잇고, 다리가 인륜을 잇고, 다리가 남북을 잇는 거라는 상상은 즐겁지만, 다리 아래의 강물은 돌아오지 않는 사람, 돌아오지 않는 평화를 한번쯤 곡소리로 울고 가기도 했을 것이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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