延命, 더 막막한 내일 / 김태수
버려져 떠돌아 더 막막한 내일의
포구에는 고깃배 서너 척 묶여 있고
여러날 미친 바다에서 돌아온 젊은 어부 두엇
낮술에 취해 비틀거린다 아무 힘낼 것 없는 세상의
서러운 일생을 마른 멸치와 막소주로 덥히다
해 기울면 산등성 달성徐氏 묘소로 기어올라
소용없는 음모도 꾸미곤 했다 더는
병 깊지 않기를 아내는 바라지만
살 속 깊이 저려오는 이 어지럼증
수심이여 네 뿌리는 어디에 있는가
어디에 있는가 억울한 나날들로
엎드린 이승의 마을이 굽어 보인다.
보인다 보릿고개를 태워 올리는 연기들 틈새로
걸린 노을과 가물대는 몇 낱의 작은 섬들
소생은 북망을 빠져나온 배고픈 원혼들과
주고받은 서너 사발의 막소주에 붉어져
풀벌레 소리, 간혹 바람에 섞여 오는
이 시대의 불길한 풍문을 듣고 있다
밤마다 숙직실 문을 부수며 밀어닥치던 해일
꿈이었구나 후줄근한 등줄기를 식히며
그때마다 마을 어귀에서
고사라도 지내는지 대댕 대댕 대댕
법고소리, 징소리, 무당의 소름끼치는
아아, 시대의 呪文들
내 이승은 몹쓸 거렁뱅이로 첩첩 안개 속의 어디로
흘러가는가 바람에 묻어 나는가 까닭없이
날 선 세상에 부딪히지도 못하는 비겁함으로
무시로 한낮을 지울 위태한 해일 앞에 웅크려 떨며
때론 연명*, 그럭저럭 살아갈까 망설이기도 하면서
친구야 하릴없이
소줏잔을 비울 것이다.
*延命마을: 통영군 산양면의 마을 이름
-『농아일기』, 도서출판 시로, 1984.
* 윤동주는 저항 시인으로 보기 어렵다는 마광수의 생전 인터뷰를 봤다. 마광수 교수는 윤동주를 공부하며, 자아를 끊임없이 성찰하며 부끄러움을 줄여 나가는 자세에서 인간적 매력을 느꼈을 것이다.
김수영 역시, “김일성 만세”를 말할 자유를 신념으로 간직하면서도 시로 발표하지는 못했다. 아내를 용서하지 못해 힘들어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나는 얼마큼 작으냐”(「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고 자책하며 이전과 다른 자신을 갈망하고 애써 나아가려 했다는 데서 그의 인간됨을 엿볼 수 있다.
두 시인은 현실 문제에 전위에 나서지도, 투사가 되지도 못했지만 최소한, 현실을 외면하지는 않았다. 신경림 시인도 그러하다. 소외된 농촌의 현실을 가감 없이 핍진하게 그려낸 바 있지만 또 한편 “돌처럼 잘아지고 굳어지나 보다”(「동해에서」)며 자신이 좀 더 너그러워져야 할 것임을 스스로에게 주문한다.
위에 인용한 시인의 시에서 윤동주, 김수영, 신경림이 보인다. 시인으로 하여금 고깃배 사람들과 낮술 하게끔 만드는 게 시대 현실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아무 힘낼 것 없는 세상”에서 무력한 개인의 자조가 읽히는 반면에, “이 시대의 불길한 풍문”, “날 선 세상”에서 어둡고 혹독한 시대상을 그려보게 된다.
시 발표년도를 고려할 것 같으면 그 시기는 1970년대 말이나 80년대 초까지다. 개발 독재의 끝에 달한 시기이기도 했고 신군부의 등장과 광주 민주화 운동이 이어지던 시기이기도 하다. 국가 질서를 핑계로 민주 인사와 비판적 언론을 탄압하던 시기이므로 있는 사실조차도 투명하게 꿰뚫어 보기 어려웠을 것이다. 설령, 사회의 부정과 모순을 선명하게 인식했더라도 자신과 가족의 고초를 각오하지 않고서야 제 목소리를 내기가 난망한 일이다.
억울하게 희생된 사람들 혹은 사지에서 겨우 빠져나온 듯한 사람들이 낮술의 자리에 몰려들면서 시인은 더 큰 부채의식을 갖는다. 시인이 간직하고 실천하고자 했던 올곧은 정신에 비해서 당장의 선택은 “날선 세상에 부딪히지도 못하는 비겁함”과 “연명”만을 생각하는 소시민성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하는 인식이 있어서다.
하지만 굳이 불편을 사고 싶어 하지 않는 다수의 침묵도 많다. 그 다수를 반성케하는 게 꼭 거창한 행동만은 아니다. 윤동주가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끊임없이 질문하고, 김수영이 정신과 행동을 일치시키려 애썼던 것처럼 시인의 고민도 깊다. 연명을 생각하면서도 막막해하고 한번 더 돌아보는 마음이야말로 니체 식으로 말하자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자세인 거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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