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구름모자 가게 /전하라

톰소여와허크 2017. 9. 13. 18:02

구름모자 가게

-조순혜 언니의 영전에 부쳐     / 전하라


 

 

 

12년 전 모자가게에 들렀다가 우연히 그녀를 알게 되었다

그날 나는 이른 시간에 그녀의 모자가게에 들렀다

모자를 팔기보다 내게 커피를 먼저 타 주던 그녀

사람들과 어울리지도 못하고 일과 가족만 알던 그녀

모자를 사지도 않고 하루 종일 그 모자를 다 써보아도

예쁘다 어울린다 칭찬해주던 그녀

나는 그녀의 모자가게에 들를 때면 패션쇼를 하였다

그런 날이면 내 머리에선 수백 개의 모자꽃이 피어났다

내가 좀 울적한 날이면 그녀는 살며시 내게 다가와서

우리 동상 뭐든 골라 기분이다 다 줄게, 하며 등을 토닥여주었다

그런 그녀가 유방암으로 세상을 떠난 지 몇 년이 지났는데

내 발걸음은 나도 모르게 자꾸 그곳으로 향한다

모자를 다 고르라고 하던 그녀의 목소리가 허전하게 내 머리에 감긴다

문득 하늘을 모니 흰 모자 같은 구름이 유유히 떠돈다

그녀는 그곳에서도 모자가게를 차렸나 보다

그녀가 보드라운 양털모자 손을 흔들고 있다

나는 오늘도 그녀가 없는 구름 가게에 들러

구름 모자를 바꿔 쓰고 5월의 강을 건너고 있다

 

 

-『구름모자 가게, 문학공원, 2016.

 

 

* 박완서의 단편, ‘여덟 개의 모자로 남은 당신은 암으로 죽어가는 가장을 위해서, 아내와 자식이 병간호하거나 다니러 오며 하나씩 구입하던 모자가 여덟 개가 되고서야 사별하게 된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때의 모자는 생전의 선물이자 고인을 추억하는 유품이 되고 말았는데, 작가의 다른 소설처럼 자전적 요소가 강하다. 시인도 의지하는 사람과의 이별을 겪고 고인을 추억하는 방편으로 모자 이야기를 들려준다.

인연은 마음을 내는 만큼 깊어지는 걸까. 부모자식 간이나 부부의 연은 말할 것도 없고, 남과의 관계도 그렇다. 가게에 들러, 내준 커피 한 잔을 마신 게 발단이 되어 가게 단골이 되고, 정을 쌓고, 정을 나누는 관계로 발전하여 남이되 남이 아닌 사이가 된다. 하지만 시작이 그랬듯이 그 끝도 도무지 알 수 없는 게 인연이다. 살갑고 고맙기만 한 시간이 지나면 예기치 못한 이별이 찾아오기도 한다.

우리 동상 뭐든 골라 기분이다 다 줄게”. 치렛말이 아닌 진심으로 이런 말을 주고받는 사이라면 오죽 기꺼운가. 서로의 마음에 담긴 사람이 되어 수 백 개의 모자꽃을 같이 피우다가, 이제 한쪽이 없는 사람이 되어 시인의 머리엔 모자 대신 그녀의 목소리만 허전하게 감돈다.

인연은 지났으되 아주 지난 것은 아닌 거. 누군가에게는 여덟 개의 모자로 남아서, 또 누군가에게는 구름 모자로 남아서 인연을 추억하는 시간을 갖는다. 박인환 시인은 옛날은 가고 추억은 남는 거라고 했지만, 사실은 이렇게 노래했기 때문에 남은 것이기도 하다. 소중한 한때나 잊기 싫은 사람을 소설로 시로 노래로 기어이 남기고서야 조금 편해지는 마음들이 있을 것이다.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