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인력시장 / 강만수

톰소여와허크 2018. 1. 9. 00:46






인력시장 / 강만수

새벽시간을 내다팔기 위해 새벽시장 할배를 난전으로 찾아갔다
새벽을 팔지 못했다

점심시간을 팔기 위해 점심장사 아재를 찾아갔다
점심 역시 못 팔았고

저녁시간을 팔기 위해 저녁장사 아줌마 가게에 들렀다
저녁마저도

밤 시간을 팔기 위해 밤 장사 할매를 찾았지만 출타 중이어서
만나지도 못하고 되돌아 왔다

오늘 하루는 꽝이다
내겐 여전히 팔려나가길 기다라는 24시간이 있다

어떤 시러베자식이냐 시간이 금이라고 떠든 인간은

- 『검푸른 비망록』, 도서출판 문장, 2016.

* 시러베자식은 시러베아들과 같은 뜻이다. ‘자식’이 ‘아들’의 의미도 있지만 동시 ‘놈’보다 더 낮추어 부르는 의미로도 상용되는 만큼 시러베자식이 시러베아들보다 어감이 훨씬 부정적인 쪽에 닿아 있다. 실상 ‘시러베자식’도 ‘실(實)+없-+-의+자식(子息)’으로 어원이 분석되어 ‘실없는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라고 하니 행동이 허랑해서 믿음이 좀처럼 가지 않는 사람에게 두루 쓰일 법한 말이다. 시인이 굳이 이 표현을 가져온 것은 어감에 대해 고려한 것도 있겠지만 정작, 이유는 다른 데 있어 보인다. 시러베자식을 ‘실업(失業)의 자식’으로 읽으면 시가 그만큼 유쾌해진다. 물론, 내용이 그렇다는 뜻은 아니다. 
시인에게 시러베자식 소리 듣는 이는 “시간이 금이라고 떠든 인간”이다. 중학 시절, 빨간 영어책에서 익힌 두 문장은 “Time is money"와 " Rome was not built in a day"다. 이 문장은 짧은 영어 실력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잊히지 않는다. 시간이 금이라는 말을 금과옥조로 받아들이고, 크거나 작은 성취를 위해선 시간을 쪼개서 아껴서 공부하고, 부지런히 일해야 하는 것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게으른 자신을 반성하는 방편으로도 꽤 유용한 속담이기도 했다. 그런데, 시인은 왜, 여기에 딴지를 놓고 싶은 건가.
새벽부터 점심, 저녁 지나 밤까지 시간을 팔기 위해 애쓰다가 결국, 자기 시간을 전혀 팔지 못하면서부터다. 인력시장이란 제목을 고려하면 여기서 시간은 노동으로 대치될 여지가 많아진다. 매일매일의 품을 팔고 그 대가로 생계를 잇는 일용직 노동자(다른 생계 수단을 갖지 못한 글쓰기 노동자의 처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의 처지가 시간의 다른 속성을 보게 한 것이다. 고용을 위해 온종일 기다리거나 찾아 나선 시간은 돈으로 계산되지 않을뿐더러 내일의 시간도 불안하기만 하다. 자본이 주머니를 풀지 않고, 시간을 쪼개서 더 열심히 일하지 않느냐고 다그치기만 한다는 걸 간파하는 순간에, 시간은 금도 아니고 돈도 아닌 게 된다. 
시인은 “여전히 팔려나가길 기다라는 24 시간이 있다”고 했지만, 시간을 돈으로 환산하는 자본의 셈법에 무작정 따를 생각은 없어 보인다. 팔리지 않는 시를 쓰는 여러 시인들의 셈법도 이와 비슷하긴 할 것이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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