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제비 / 장유정

톰소여와허크 2018. 1. 5. 12:41




제비 / 장유정



그는 떠나고 다시 오지 않았다.


주섬주섬 박토된 터전 챙겨 출입국 문을 나설 때 비상을 꿈꿨던 그는 알았을 것이다.


두 집 살림하는 그, 본시 여럿을 거느리는 습성이 있어 매몰차게 뿌리치기 난감했을 것이다.


유년의 추녀 밑에 기식하며 지푸라기나 나뭇가지로 집을 짓기 시작한 것은 일생을 걸고 하던 약속이었다.


그의 부리는 톱, 먹줄, 줄자, 대패, 망치였다.


발을 헛디뎌 사닥다리마저 부서지고 날갯죽지 가슴에 묻길 부지기수, 입 벌려 먼 이역 타향살이의 고달픔을 빨랫줄에 앉아 토해냈다.


만약 그 때, 챙에 드리워진 가계가 허물어지지 않았어도 귀소본능을 알고 있는 그, 여기에 붙박이로 안주했을까?


언제나 떠날 것에 준비되어 있는 외줄타기, 제 집 찾아나서는 염치없는 추억들


하늘에 실금처럼 줄이 그어졌다.


- 『그늘이 말을 걸다』, 문학의숲, 2016.



* “저 지붕 아래 제비집 너무도 작아/ 갓 태어난 새끼들만으로 가득 차고/ 어미는 둥지를 날개로 덮은 채 간신히 잠들었습니다/ 바로 그 옆에 누가 박아 놓았을까요, 못 하나/ 그 못이 아니었다면/ 아비는 어디서 밤을 지냈을까요”(「못 위의 잠」부분)로 시작되는 나희덕 시인의 시구가 생각난다. 가족에 헌신하며 자신은 못 하나에 의지해 불안한 잠을 청하는 가장의 모습이 잘 드러난 시다.

장유정 시인의 ‘제비’도 가장으로서 집을 장만하고 가정을 건사하기 위해 애쓰는 고달픔은 다르지 않지만, 결정적으로 “두 집 살림”을 하는 데서 가장의 체면이 여간 깎이는 게 아니다. 이는 “인도, 태국, 캄보디아, 베트남, 오스트레일리아 등지에서 겨울을 보내고 봄에 우리나라에서 처마 밑에 집을 짓고 살다가 가을에 날아간다”(표준국어대사전 인용)는 제비의 속성과도 관련이 깊다. 좁혀 생각한다면 외국인 노동자가 여기서 가정을 꾸렸다가 끝내 가정을 책임지지 못할 상황이 되자, 본국에 있을 또 다른 가정으로 날아가는 사정을 짐작해볼 수는 있겠다.

하지만, 이시의 함의는 좀 더 다양해 보인다. 앞서 나희덕 시인이 실업으로 위축된 이 시대 가장의 모습을 담아냈던 것처럼 장유정 시인 역시, 가장 혹은 남성의 이중적인 처신이나 위선을 드러내고 있다. 어느 한쪽에 충실하기 위해서란 구실로 아니면, 자유 기질이나 방랑벽을 핑계로 남은 가족에게 상처를 주는 행위에 대해 따가운 시선을 보내는 거다.

“하늘에 실금처럼 줄이 그어졌다”는 마지막 구절에서 “실금” 자체가 상처이기도 하고, 이쪽저쪽을 넘나드는 인연에 대한 회한과 저쪽에 대한 작별의 마음이 읽혀서 여운이 오래 남는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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