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아홉 벌의 옷을 껴입었다 / 손현숙
부재중 찍힌 전화가 아홉 번
연락을 할까, 말까 망설인다
아홉은 내가 아는 완전수
그녀는 아홉 벌의 옷을 껴입고 다섯 번의 봄을
백골로 살았다 부산진구 초읍동의 한 빈민가
쪽방에서 겨울을 넘기기 위해
방 안에서도 목장갑을 끼었다 아무도 찾지 않는
집, 손수 보일러도 끄고, 전등불도 끄고
혹한이 들어오실까, 구멍이란 구멍은 죄다 틀어막고
문이란 문 죄다 닫아걸었다
무덤처럼 동그란 공간 속이 따뜻해라,
아홉 벌의 옷이 일으키는 정전기처럼
수돗물 똑, 떨어지는 소리에
몸이 조금 움직였으려나 먼지처럼 소리가 일어서는
집, 이 방 저 방 기웃거리면서
백골이 될 때까지 살았다
머리 가르마처럼 반듯하게 누워서
옷 벗겨줄 사람 없어
아니다, 아홉 겹의 옷을 벗기려면
너무 수고롭겠다, 제 몸을 제가 염했다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었던 듯
저에게 저를 송두리째 버렸다
‘잘 있었어?’ 아홉 벌의 옷을 벗겨내자
‘잘 있어요’로 최후로 달싹, 거리는 백골의 입술
- 『일부의 사생활』, 시인동네, 2018.
* 제목만 봐서는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라는 말이 연상될 정도로 말의 재미를 느끼게 하는데 실상 시의 내용은 현실의 어두운 단면을 담아내고 있다.
부재중 전화 아홉 번으로 “아홉 벌의 옷”으로 남은 독거노인의 시신을 환기한다. 추위를 누그리기 위해서 노인이 껴입은 옷이 다섯 벌일 수도 있고 여섯 벌일 수도 있지만 끝없이 나오는 옷가지를 두고 어느 신문기자가 아홉 벌이라고 적는다고 해서 기자 정신이 없다고 탓하는 건 오히려 시의성(時宜性)을 놓치는 일이 될 것이다.
아홉이란 숫자는 낯설지 않다. 노름에선 아홉 끗이 제일이다. 완전에 가까운 충만된 숫자지만, 채우지 못한 한 자리의 결핍이 유난하게 인식되는 자리기도 하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고 아홉 켤레 구두를 남겨두고 행방불명된 사내(윤흥길,『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와 “ 문수(文數)가 다른 아홉 켤레의 신발을”(박목월, 「가정」) 건사하려는 고단한 가장을 이야기하면서 아홉이 나오는 것이 우연만은 아니다. 시인 역시, 처음에는 아홉을 “완전수”로 끌어왔지만 결과적으로는 지독한 ‘결핍수’였음을 깨닫게 한다.
손현숙 시인은 사진작가이기도 한데, 결정적 순간이나 장면을 포착해서 이를 이야기 형태로 푸는 데 능하다. 다만, 이 시의 결정적 장면은 시인의 눈이나 카메라에 직접 포착된 것이 아니라, 독거노인의 죽음을 다룬 기사에서 취한 것이다.
“아홉 벌의 옷을 껴입고 다섯 번의 봄을/ 백골로 살았다”
이 말 자체가 결정적 장면을 대신한다. 이웃의 무관심 속에 오 년이나 시체가 방치된 일도 끔찍하고도 무람하지만 이와 같은 일이 수시로 생겨나는 것이야말로 부인할 수 없는 사회 비극이다. 시인은 자신의 감정을 최대한 절제하면서, 백골이 된 주검에서부터 주변의 정물에다 카메라 초점을 분산시킨다. 그리고 사건의 이전과 이후를 잇는 영상을 재구성한다. 영상의 끝은 백골이 전하는 인사말이다.
“잘 있어요”.
추위로 아홉 번 껴입을 동안, 온기 한 줌 전하는 이 없는 이 세상에 망자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다. 아직 열두 척의 배가 있다고 희망을 말하는 사람도 훌륭하지만, 공동체에 더 필요한 사람은 이웃집 보일러가 도는지 살피는 그런 눈길을 가진 사람일 테다. 신이 있다면 추위와 무관심 속에 혼자 껴입은 사람을 자신의 자리로 당겨주어야 마땅하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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