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황한 주소 / 이향아
‘대한민국’ ‘아무개’라고만 해도 편지가 척척 들어온다고
우쭐대던 사람이 생각난다
내 주소는 그러나 길다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무슨 마을 아파트 몇 동 몇 호
진저리나는 잔소리처럼 주절거리는 주소
기웃거려 헤매다가 길을 잃고서
그런 사람 모른다고 되돌아간 편지
되돌아간 진실
되돌아간 사랑
되돌아간 미래
대학 다닐 때 남의 집 문간방에서 자취할 때
꺼져가는 연탄불 살리느라 정신없이 엎드려 있는 동안
그 편지도 엎드려서 돌아갔을까
핑계지, 길이 막혀 되돌아간 것은 가짜지
그런데도 나는 지루한 주소 때문에 사랑을 잃었다고 우긴다
그렇게 믿어야 체면이 설 때,
이래저래 세상이 시들해 질 때,
나를 실망했는지 작파들을 할 때,
사는 일이 고단한 것은 너절한 주소
길이 엇갈린 것은 장황한 주소 때문이라고
안부조차 캄캄한 것은 오로지 긴 주소 때문이라고
- 『물푸레나무 혹은 너도밤나무』,고요아침,2009.
* 사는 일이 뜻대로 풀리기보다 그렇지 않을 때가 더 많다. 내가 주체적으로 선택하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 다른 방도가 없을 때 선택하는 것이기도 하다. 조금 엄살을 부려 말하면 그런 선택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아 답답할 때가 부지기수다.
내가 정성을 들이고 꼭 원했던 일은 그것이 이루어지면 이루어진 대로, 수포로 돌아가면 또 수포로 돌아간 대로 삶의 방향을 달라지게 한다. 이때 마음이 쓰이는 쪽은 항상 뜻대로 되지 않는 경우다. 여기선, 기다리던 편지를 끝내 받지 못한 젊은 날의 시인이다. 자신에게 닿지 못한 편지는 단순한 편지 한 장을 지나서, 진실과 사랑과 미래를 저편 반대쪽으로 되돌아가게 하는 사건이다. 시인이라고 해서, 이 사건의 실체를 다 아는 건 아니다. 시인의 염려대로 “나”를 실망했을 수도 있지만, 편지를 부칠 수 없는 사연이 생겼거나, 편지를 부쳤으나 다른 자취생이나 누군가의 손에 들어가는 이야기는 그럴듯한 고전적 스토리다.
시인은 자신에게 우호적이지 않은 세상을 원망하고 남을 탓하는 대신, 장황한 주소 탓을 한다. 조금 엉뚱해 보이는 생각일 수 있지만, 자신에게 와야 할 것이 제대로 오지 못한 책임을 자신에게도, 다른 누구에게도 지우지 않았으니 아주 지혜롭고 속 편한 처방이다. 이런 처방도 스스로 여유를 찾고, 삶의 우여곡절이나 부조리를 깊이 이해하는 데서 나왔을 것이다.
기다리던 편지가 오거나 말거나, 지금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야 하는 건 전혀 달라지지 않음을 생각한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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