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해변의 카프카 / 여영현

톰소여와허크 2018. 5. 22. 22:32

해변의 카프카 / 여영현


달이 뜨면

고요하고 집요해라

한세상의 사심이여

나는 저 완전한 원형이

불안하네

무엇이든 차면 기운다는 그 말씀

그러나 차지 않고 벌써 기운 그 말씀,

세상의 모든 말씀은

불공평하네

백야엔 지구의 반사면이 밀물로

차오르네


신은 위대했다

노래하지 않아도

내가 사는 세상은 부조리한 문장뿐

보드룸 해변의 모래밭에 빨간 인형이 엎어져 있네

어릴수록 빨리 죽고

게처럼 옆으로 기어갈 때 탈이 없었네

죽은 손바닥에선 모래가

흐르네

이 아픈 자각은 낭만적인

휴양지여서

더 슬프네

바이런은 일찍 죽었네

차라리 카프카처럼 새파란 입술로

노래해야지

이 모든 게 부조리한 달빛,

저 달빛 때문이라고……


- 『밤바다를 낚다』,천년의시작,2018.


  * 보드룸 해변: 터키의 휴양지, 세 살배기 ‘쿠르디’가 숨진 채 파도에 밀려왔다.

 


  - 부조리는 이치에 닿지 않는 일을 칭하는 말이기도 하고, 삶의 어떤 의의도 발견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을 뜻하기도 한다. 실제, 둘의 의미가 혼재되어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형벌로 바위를 정상까지 거듭 밀고 올라가는 시시포스의 무의미한 노동을 생각하거나, 뫼르소가 태양의 뜨거움을 핑계로 권총 방아쇠를 당기는 이야기를 생각하면 시인이 『시시포스의 신화』와 『이방인』을 썼던 까뮈를 인용해야 할 것 같은데 시인의 선택은 카프카다. 카프카 역시 『변신』 등으로 부조리한 삶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 성향을 보이기도 했지만, 작가 스스로도 세 번의 약혼과 파혼을 거듭하며 바이런보다 몇 년 더 살았을 뿐이다.

카프카를 인용했다고 했지만, 좀 더 정확히는 해변의 카프카다. ‘해변의 카프카’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제목이기도 하다. 시인의 관심이 ‘해변의 쿠르디’에 있고, 쿠르디로 인해 부조리한 삶을 떠올렸으니 자연스레 카프카까지 생각하게 되었을 것이다.

소설 『해변의 카프카』에서 카프카는 15세 소년 다무라 자신이면서 그림 제목이기도 한데, 묘사된 그림 자체만 본다면 그 정경이 평화롭기 그지없다. 한 장의 사진으로 남은 쿠르디는 그 평화의 반대편을 참혹하게 보여주면서 거꾸로, 평화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역설하고 있다. 다무라는 아픔을 겪고 터프한 그 또래의 소년으로 돌아올 기대를 갖게 한다. 어쩌면 다무라 같은 친구들이 미래의 하루키도 될 수 있고 카프카도 될 수 있을 것이지만 쿠르디는 세 살에서 멈춰서 어떤 모험도 살지 못한다. 지금도 지구촌 곳곳에 내전과 분쟁으로 쿠르디와 같은 무고한 아이들이 희생되고 있다.

지구 한쪽엔 잘 차려 입고 먹는 사람들이 다음 여행지를 살피는가 하면, 그 반대편엔 “어릴수록 빨리 죽고” 또, 살기 위해선 옆으로 기면서 눈치를 봐야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정말, 지독한 부조리다. 신도 있고, 현자도 있고, 양심도 있을 텐데 어떤 이유에서든 이 부조리는 요지부동이다. 차고 기우는 이치라면 혹 모를까 일방적으로 기울기만 하는 이 오래된 “불공평”에 대해서 시인은 “달빛” 탓을 하며 답답한 마음을 표한다. 애꿎은 달빛 탓이 아니라 달빛의 환함만 보려는 인심에 대한 경종의 의미로 읽고 싶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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