헛발질 꽃 / 황동규
어금니 두 개 뽑고, 솜뭉치 물고
저녁은 거르고
애꿎게 가만있는 식물도감만 뒤적인다.
오래 같이 산 꽃도
선만 보고 만 꽃도 있다.
어떤 놈은 너무 낯익어, 초면이지만,
혹 전생에 이웃 사이가 아니었을까?
쳐다보기만 하고 살다 어느 날 한쪽이 이사 간,
전생이 있다면,
나는 혹시 내 헛발질을 맛본 꽃은 아니었을까?
마을 입구에서 안 오는 버스, 안 오는 사람 기다리며
밟아 문지른 짚신나물꽃,
어쩐지 하늘보다 발밑이 훤하다 싶더니,
뭉개질 때
꽃도 이 못난 인간처럼 아팠을까?
지끈지끈 아픔 태어날 때
새삼 삶이 붙어 있는 몸의 깊이를
겪었을까?
- 『우연에 기댈 때도 있었다』, 문학과지성사, 2003.
* 어금니 뽑기 전후의 욱신욱신한 통증이 떠오른다. 앓던 뿌리가 깊어서인지 아픈 기억도 달려 나오나 보다. 식물도감 속 짚신나물꽃에 꽂힌 기억이다.
시인이 이 꽃을 이전부터 알고 있었는지, 그날에 발길질당한 노란 꽃이 짚신나물꽃이 맞는지 확실치 않다. 짚신이란 단어에 발길질이 유추된 걸로도 보인다.
오래전 “쳐다보기만 하고” 고백을 못했던 인연이라도 있었을까. 뒤늦게 작정하고 나섰지만 떠난 버스가 돌아올 리 없고, “안 오는 사람” 기다려도 말짱 헛일이다. 하필이면 그때 눈에 든 게 짚신나물꽃이다. 시인은 그 꽃을 밟아 문지르고 만다. 자신이 당한 아픔을 엉뚱한 데 푼 것이다. 그래서 제대로 된 발질이 아니라 헛발질이다.
시인은 뒤늦게 영문도 모르고 뭉개진 꽃을 아파한다. 또한, 자신이 그런 꽃이었다는 생각도 한다. 지끈지끈 아픔이 일 때 몸은 아픔을 어딘가에 저장해 두고, 그로 인해 깊이를 더하는 면이 있다. 자신의 아픔을 어떻게 대하느냐를 보면서 그 깊이를 짐작하기도 하지만 더 많은 경우엔 남의 아픔을 두고 어떻게 마음을 쓰느냐를 보며 깊이를 가늠해보기도 할 것이다.
사실, 몸과 마음의 깊이를 재는 일정한 잣대가 있을 리 만무하다. 그럼에도 타인의 생각과 경험을 읽고 자신을 돌아보는 일을 꾸준히 하는 것만이 잣대에 부합하는 일일 듯도 하다. (이동훈)
* 사진 출처 : 풀나무 이야기 http://blog.daum.net/jslee330/8932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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