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기자술 / 배창환
쪼맨할 땐 그게 그건지 잘 몰랐습니다
참말입니다
고 바알간 놈이
대처로 살길 찾아 떠난 순철이네 빈 집
무너진 돌담 돌아가던 것이
내 서른 고개 넘어서야 우리 아파트
녹슨 철창 타고 건너와 구시렁구시렁 쏟아지며
아버지 제삿날만 되면
뼈마디 자근자근 밝혀드는 구기자일 줄이야
고놈 똑똑 따다가
대추까지 섞어서
쐬주 쏟아부으면 기막힙디다
쫄깃쫄깃 은근슬쩍 입안에 착 달라붙는 것이
요거야말로 피같은 술맛 아닐는지요
돌아가신 아버지 대문 차고 먼저 와
다 잡숫고 취하신 줄도 모르고
어머닌 자꾸만 네 아버지 몰래 먹어두라며
퍼주고 또 퍼주고 하시지만요
- 『다시 사랑하는 제자에게』,실천문학사,1988.
* 내겐 「서문시장 돼지고기 선술집」, 「겨울 가야산」으로 기억되는 배창환 선생을 우연히 만나고 집에 와 시집을 찾으니, 교육운동으로 해직을 앞두고 제자에게 또 자신에게 건네는 이야기들이 가슴에 와 닿는다.
묵직한 이야기 속에서도 「구기자술」처럼 일상의 사소한 발견, 그로 인한 잔잔한 재미까지 느끼게 해주는 시도 있다.
구기자(枸杞子)는 가시가 헛개나무를, 줄기가 버들을 닮았다 해서 이름 지어졌다고 하는데, 가시 때문인지 늘어지는 풍취가 있어서인지 울타리로도 제법 쓰였다. 6,7월에 피는 보라색의 꽃은 그냥 지나치기 어려울 정도로 화사하다. 개인적으로 가을 무렵에 구기자꽃을 보며 지났던 기억이 있는데, 일 년에 두 번 꽃을 피우는 힘센 나무라는 걸 새로 알았다.
시인은 빨간 열매를 따서 대추를 섞어 술을 담갔지만, 뿌리나 잎을 같이 담가도 된다고 한다. 시인의 말마따나 “입안에 착 달라붙는” 열매 쪽에 끌리긴 하지만 나중에라도, 어느 쪽이 나은지 실험하고 시음할 기회가 있기를 바랄 뿐이다.
어릴 적 곁에 두고도 몰랐던 구기자를 어른이 되어서 알아보게 되고, 그 구기자로 술을 담그고 그 담근 술을 생전의 아버지가 즐겨 마시던 거란 것까지 알게 되면서 시인은 퍽이나 즐거운 기분이다. 몰랐던 것을 새로 깨닫는 즐거움에다 구기자를 통해 아버지와 연결되고, 그 매개자 역할을 어머니가 자연스레 하는 것이니 시인의 감정도 구기자 술맛만큼 은근했을 것이다.
어머니가 아버지 몰래 술을 내는 것도 재미난다. 살아생전에 그랬듯이 죽어서도 남편의 체면을 생각해주면서 자식을 챙기려는 어머니 모습이 선하다. 「서문시장 돼지고기 선술집」에서 보았던 아버지 모습도 그렇다. 누이형제들 몰래, 아들인 시인에게만 돼지국밥을 사주는 정경이 삼삼한데, 그 ‘몰래’란 것도 이쪽저쪽을 다 배려한 아버지 나름의 사랑법이기도 한 것이니.
구기자술에 “구시렁구시렁” 이야기가 잘도 따라온다. 언제 구겨진 인생 펴고 싶을 때 역설적으로, 구기자술! 이렇게 외며 한 잔 할 때 한 걱정 덜어가기도 할 거 같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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