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르네상스 안경점 / 조동범

톰소여와허크 2019. 1. 25. 22:34




르네상스 안경점 / 조동범

 

 

찬란과 풍요의 거리 피카소로 가는 길목에 르네상스 안경점이 있다. 식빵처럼 빛나는 진열장의 불빛이 안경알 너머에서 웅성거린다. 안경사는 무료하게 빛나는 불빛에 밥을 말아, 천천히 늦은 저녁을 먹고 있다. 그녀는 좀처럼 호기심을 드러내는 법이 없다. 기념일처럼 펼쳐져 있는 세상 앞에서 그녀는 창밖으로 무기력한 시선을 풀어놓는다. 피카소로 가는 행렬이 담쟁이처럼 무성하게 거리를 뒤덮고 있다. 무심하게 창밖을 바라보는 그녀는 숟가락을 든 채 말이 없다. 그녀는 화석처럼 앉아, 초라한 식사를 마친다. 그녀는 마지막 손님을 위해 안경알을 연마한다. 손끝에서 연마되는 세상. 천천히 하나의 세상을 완성해 보이는 그녀는 짧은 감탄사를 토해낸다. 퇴근 무렵, 담쟁이가 르네상스 안경점에 매달려 바람에 흔들린다. 그녀는 부주의하게 철제 셔터를 내린다. 담쟁이의 짧은 비명이 금속성을 내며 부러진다. 그녀는

화석이 되어 담쟁이, 긴 덩굴을 바라본다.

 

- 심야 배스킨라빈스 살인사건, 문학동네, 2006.

 

 

* 피카소 거리가 어딘가 싶었더니 서울 홍익대 부근이다. 원래 먹자골목으로 부르던 것을 미술대 위주로 거리 전시를 빈번하게 하면서 피카소 거리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니 지역의 특성을 잘 살린 명명으로 보인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드는 거리, 그래서 늘 기념일처럼 붐비는 곳에 르네상스 안경점도 있다. 르네상스는 중세의 경직된 분위기에서 깨어나 개인에게 관심을 가지며 학문, 건축, 예술 등 다방면에서 크게 진작된 문예 부흥 시기를 일컫는 말이지만 가게 상호로도 인기가 높다. 유행을 선도하는 새로운 사조란 의미도 있는 데다 부흥이란 이름에서 가게 살림이 부쩍부쩍 늘고 거래도 흔전흔전 잘 될 거 같은 인상이 있어서다.

하지만 이 순간에도 세를 내지 못하고 폐업하는 가게 수가 부지기수인 것을 생각하면 상호에 담긴 소망이 쓸쓸해지기도 한다. 창밖은 붐비는 거리지만 안경사 혼자 천천히 늦은 저녁을 먹는 안경점 안은 한산해 보인다. 그녀의 표정에서 고단함과 피로가 묻어나지만 안경알을 만질 때만 생기가 도는 걸 시인은 놓치지 않는다. 시인의 관찰력은 마지막 순간에 빛난다.

부주의하게 내린철제 셔터에 담쟁이가 잘려나간 것이다. 그녀도 누군가가 또는 어떤 세력이 부주의하게 내린말하자면, 임차인을 보호하지 않는 법안 등에 치여 머리를 움켜잡을 날이 곧 생길지 모른다. 말년에 활짝 핀 피카소처럼 없이 사는 사람의 르네상스도 그렇게 오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