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도 바람이
-상록마녀 / 신단향
사람들은 심장에
바람 한 마장씩 안고 산다
한 사람이 다가올 때마다
돌개바람이 따라분다.
칼바람이 나뭇가지를 베는 겨울
시린 손으로 바람을 움켜잡아 본다.
사는 건 베어지는 심장
바람을 잠재우기 위한 일이다.
- 『상록객잔』, 도서출판 움, 2018.
* 영화 속 용문객잔은 사막 중간에 잠시 쉬어갈 만한 자리에 있으면서 무림고수 간 암투가 벌어지는 공간이다. 반면에 상록객잔은 도심의 골목에 있으면서 직장인과 주변 업소 사람들이 주로 들리는 곳으로 보인다. 더러 이름난 칼잡이도 있겠지만 대개 남의 칼에 상처 입은 사람들이 주 고객이다. 목을 축이며 서로의 간을 떠보기도 하는 주점에서 시인은 주점의 얼굴인 상록마녀를 자처한다.
상록객잔에 들리는 이들은 한 칼 제대로 휘두르지 못하는 이들이 대부분이긴 해도 할 말은 더 많다. 그들이 꺼내는 시끌시끌한 사연을 요리해야 할 일도 상록마녀의 몫이겠지만 서시 격인 이 시는 마녀 이름에 걸맞지 않게 아주 서정적이다.
“사람들은 심장에 / 바람 한 마장씩 안고 산다”.
이 표현에 잠깐 멈추기만 한다면, 심장에 손을 대어 자기 안의 바람을 생각하는 것이 특별한 일은 아니다. 그 바람의 세기와 냄새가 현실을 견디게도 하고, 더 힘들게도 하고, 마침내 현실을 떠나게도 할 것이다.
바람을 안고 온 사람들은 객잔에 닿자 마자 바람을 내놓더니, 몇 잔 술에 돌개바람을 만들기도 한다. “사람이 온다는 건 /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 그는 / 그의 과거와 / 현재와 / 그리고 / 그의 미래가 함께 오기 때문이다(정현종, 「방문객」중)”라는 시구처럼 상록마녀는 그 바람을 늘 좋게 맞는 사람이다. 더러 장소와 방향을 가리지 않는 공격적인 바람에는 바람을 칼질하는 무공을 예사로 구사해야 할 거 같은데 상록마녀는 주춤하는 기색이다.
“사는 건 베어지는 심장”이라니!
객잔을 찾는 손님이나 응대하는 상록마녀는 베어지는 일에 익숙하다는 점에서 동류다. 베는 주체는 다소 모호하다. 베는 주체가 인정을 두지 않는 세상일 수도 있지만 자신 안에 있는 바람이 자신을 베는 것으로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바람의 의미도 중첩적으로 겹친다. 바람은 잠재워야 할 대상이기도 하지만, 앞서 보듯이 그 바람으로 인해 현실을 사는 동력을 얻고, 그 바람이 있어서 먼 데 눈을 주며 설레기도 하는 것이다.
지나치게 조용한 심장은 바람이 빠져나간 자리인 줄 알겠다. 거꾸로 지나치게 부푼 심장이 걱정된다면 가까운 객잔에 들러 상록마녀의 칼침 한 대 맞으면 도움이 될 것이다.(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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