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옥, 『깨어남의 시간들』, 돌베개, 2019.
대학교수이기도 한 저자는 송광사 여름 수련회를 시작으로 수행자의 삶을 자기 삶의 일부로 들였다. 궁극에는 삶과 수행이 구분되지 않는 단계까지 나아가서, 깨달음의 지경을 넓히는 데서 삶의 의의를 찾으려는 마음을 내고 있다. 수행처에서 “영적 진화를 돕는 일 혹은 수행 정진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잘 사는 삶이며 윤회의 굴레를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이라며 현묵 스님의 말을 요약하기도 했는데 저자가 수행의 길에 나선 이유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송광사, 송광암, 롱아일랜드, 안국선원에서 있었던 수행 과정을 차례로 밝히고 자신의 삶의 한때를 돌이켜보는 이야기도 좋았지만, 개인적으로 제일 흥미로웠던 대목은 ‘벽암록 공부하러 가는 길’이다. 대구에 집이 있는 저자는 고우 큰스님이 있는 봉화 문수산 금봉암으로 수시로 다닌다. 벽암록을 공부시켜 준다는 말에 혹해서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내달려 가면 스님은 벽암록 얘기를 전혀 하지 않고, 비슷한 책 한 번 펴보지 못하고 돌아온 게 수차례였단다. 저자는 벽암의 사연을 떠올린다. 푸른 바위가 곧 벽암이다. <원숭이는 새끼를 품고 푸른 산으로 돌아가고, 새는 꽃잎 물고 푸른 바위 앞에 떨어뜨린다>(『조당집』)는 선회의 말에서 원숭이에게서 소유를, 새에게서 버림을 읽는 것인데 저자는 어느 순간 큰스님의 가르침에 닿았음을 직감하며 탄성을 지른다. “길가의 산과 들이, 나무와 새들이 보여주고 들려주는 것들 하나하나가 다 『벽암록』 구절이고 『벽암록』 읽는 소리였다. 중앙고속도로 변 산천초목의 무정법문이 『벽암록』인 줄 비로소 알았다”며 들뜬 기분을 감추지 않는다.
대구에서 봉화로 오가는 길에 숱한 배움이 있었고, 저자는 이를 이야기로 풀어놓는다. 금호강에서, 다부동에서, 위천 방둑에서, 빌뱅이 언덕에서 보여준 저자의 경험과 인식과 깨달음은 또 하나의 벽암록으로 다가온다. 다부동에서 전쟁으로 목숨을 잃은 영령들을 위해 기도하며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팔공산에 깃든 중생(뭇짐승)들이 로드킬 당하는 아픔을 피부로 느끼며, “아, 300회 이상 이 길을 달려가고 달려오면서 나는 얼마나 많은 중생을 죽여서 나뒹굴게 했을까. 그 죄업을 어떻게 참회할 수 있을까”라고 참회하는 마음을 갖는다. 이런 마음은 밭 한 뙈기를 종달새, 까마귀, 다람쥐, 메뚜기 등 온 세상 모두의 것이라고 본 권정생 선생의 마음과 통한다. 실제 저자는 권정생에게 배워야 할 내용을 ‘권정생경’ 6장으로 나누어 설명하는데 어느 경전보다 눈과 귀에 쏙쏙 잘 들어온다.
저자는 “이 세상 어디 내 스승 아닌 존재가 없다”고 얘기하며, “다음 생에 눈 밝은 이로 태어나 그 은덕을 갚아야 한다. 어두운 세상 앞 못 보는 분들의 길잡이가 되는 날을 기다린다”고 덧붙였으니 저자의 바람이나 지향이 소박한지 거창한지 감이 안 오지만 또 한 분의 스승을 마주하는 기분이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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