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신애, 이중기 엮음, 『원본 백신애 전집』, 전망, 2015.
영천 출신의 백신애는 경상북도 최초의 여성 교사로 알려져 있다. 조선여성동우회 등 사회주의 관련 활동에 나선 것이 문제가 되어 해직된다. 부유한 집안에서 자라며 한학 등 전통교육을 받고 경북도립사범학교 졸업 후 교직에 나가기도 했으나 그녀는 자기 생을 평범하게 두지 않는다. 여성 운동과 조직에 회의가 생겼을 때 혼자 몸으로 밀항선을 타고 시베리아 행을 감행했다. 도중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 달 감금되기도 하고, 국경지대 인근을 방랑하기도 한다. 일본 동경에서 공부하기도 하고, 결혼과 이혼을 경험하고, 중국 청도에서 얼마간 있기도 했다.
백철의 회고에 따르면 1939년 초 노천명의 집에 있던 백신애가 백석, 백철을 불러 셋이 친남매처럼 잘 어울리던 시절도 있었으나 위장병이 악화되어 죽고 만다.
글을 엮은 이중기 시인은 『방랑자 백신애 추적 보고서』(2014)를 쓰며 백신애의 흔적을 좇고 그 연장선상에서 전집을 내며 백신애에 대한 연구와 조명이 수월하게 이루어지게끔 하는 결정적 역할을 해주었다.
소설 두어 편을 따라가본다. 「적빈」(1934)은 두 아들의 어머니가 겪는 고충을 다루고 있다. 큰아들은 철딱서니 없는 멍짜로 살다가 벙어리 처녀와 겨우 결혼했으나 자기 입만 위하고 그나마 굶을 때가 많다. 남의 집 고용살이인 작은아들은 결혼 후에도 부지런히 일하여 집을 장만할 즈음 노름으로 재산을 탕진한다. 어느 날 보리쌀이 조금 생긴 어머니는 딱한 큰며느리를 먼저 챙기지만 정작 자신은 굶으며, 허기질까 봐 똥까지 참는다는 얘기다.
「광인수기」(1938)는 일본 유학 간 남편을 기다리며 시모와 시누이의 구박을 견디던 아내의 고백담이다. 남편은 돌아왔지만 (사회)주의자가 되어 집안을 돌보지 않고 병치레만 더하는 것을 애써 구완했더니 바람을 핀다. 불륜의 현장에서 엿듣게 된 남편의 육성은 자신은 불행하다는 거다. “(…)그 녀편네는 나에게 무지하기를 원하고 생활이 평안하도록 일하는 남편이 되기 원하며 자식에게 정신적으로 충실한 종이 되기를 원할 따름이여요. 그러니 나라는 사람은 어느 결에 나를 위한 삶의 시간을 가지란 말인가요”라는 말은 당시 부모의 뜻에 의해 결혼했던 지식인 남자들의 보편적 인식에 가깝기도 했을 것이다. 아내와 자식까지 부정하는 듯한 남편의 말에 여자는 더 큰 불행과 충격 속에 빠지고 소설은 급속히 파국으로 치닫는다.
백신애의 죽음 이후 원고지에 남은 「아름다운 노을」(1939)은 그녀의 마지막 소설이 되었다. 이혼 경험이 있는 여 화가가 재혼 상대로 거론되는 의사의 남동생을 좋아하는 얘기다. 애초에는 그림 모델로 꿈꾸던 이상적인 대상으로 남동생을 보았던 것이지만 둘의 감정은 조금씩 서로에게 밀착된다. 통속으로 흐를 수 있는 내용이지만 그 경계에서 긴장감 있게 읽힌다. 서두에 “인간의게 만일 가치 있는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많이 연소했든가 하는 것이다. 라고 안드레이 지드가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타려고 해도 탈 수도 없는 가장 에끈는 이야기였다”라고 적혀 있다. 실제 백신애의 삶은 타려고 해도 탈 수도 없었던 삶이 아니라 뜨겁게 타서 연소해버린 삶에 가까웠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노천명이 한때 백석을 좋아했듯이 연상의 백신애도 백석의 시를 읽고 백석을 만나고 싶어 했고 몇 번의 만남을 가졌다. 혹, 백석의 시에 이때의 흔적이 있는지 살펴보는 것도 재미날 거 같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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