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권정생을 사랑한 사람들

톰소여와허크 2020. 1. 9. 11:12




권정생을 사랑한 사람들 / 이동훈


권정생은 이름 그대로 바른 생을 살다가 간 사람이다. 권정생 같은 분을 기리지 않으면 어떤 분을 기릴 것인가? 이 물음을 생각하면, 고인의 뜻과 다르더라도 생전의 오두막이 보존된 것은 잘된 일이다. 현재, 권정생어린이문화재단과 권정생 문학관(권정생 동화나라)이 선생을 기리는 사업을 이어오고 있다. 어느새 12주기가 훌쩍 지난 지금에도 권정생이 쓴 책들이 꾸준히 읽히고 있고 권정생을 읽은 책들이 종종 나오고 있다.
박준 시인의 산문집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2017)에 권정생 유서가 일부 인용되어 있다. 자신이 보았던 유서 중에 가장 아름다운 유서를 자기 책의 유서인 양 옮겨둔다고 했다. 『천국의 이야기꾼 권정생』(2012)을 쓴 소설가 정지아도 작가의 말에서 권정생의 유언장 한두 줄만 보고 울었다고 했다. 구례 출신의 정지아는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울지 않았던 ‘빨치산의 딸’(2005)이니 눈물이 흔한 사람은 아닐 것이다.
박준은 첫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2012) 서문에서, 당신처럼 아름다워보자고 시작한 일이 시집을 묶는 일로 결실했음을 말하며 이 세상에 두엇쯤의 당신이 있다고 했는데, 권정생이 바로 그런 당신이었거나 당신에 가까운 사람이란 생각이 든다. 아닌 게 아니라, 박준은 어릴 때 많이 읽었던 책으로 『강아지똥』과 『몽실언니』를 들었고, 근래에 『우리들의 하느님』(1996)을 읽는다고 했다.
『우리들의 하느님』은 성균관대 앞에서 인문사회 책방 ‘풀무질’을 25년 이상 운영했던 책방지기 은종복이 으뜸으로 추천하는 책이기도 하다. 대학 주변이나 골목에 흩어져 있던 동네 책방이 대형 중고책방과 인터넷 거래에 밀려 문을 닫거나 닫을 위기에 직면해 있다. 은종복은 이런 중에 겨우 혹은 간신히 책방을 이어온 역사를 『책방 풀무질』(2018)에 담아 출간했다. 책 속에 권정생의 삶과 글에 대한 애정이 나타나 있다. 권정생이 『우리들의 하느님』에서 말했던 “온 세상 아이들 얼굴에 환한 웃음꽃이 피는 세상을 안아 오는 것”, “남북이 평화롭게 하나되는 날을 맞는 것”은 고스란히 은종복의 바람이기도 하다. 은종복이 권정생과 따로 교류를 한 것은 아니지만 권정생의 책을 잡지에 종종 소개하면서 애독자의 도리를 다한다. 권정생의 임종 소식을 듣고, 혼자 안동까지 내려간 은종복은 내리는 빗속에 조의를 표하며 마지막까지 의리를 보여주었던 사람이다.
은종복의 『책방 풀무질』은 지역 출판사인 한티재에서 출간되었다. 오은지, 변홍철(시인) 부부가 운영하는 출판사 한티재는 권정생의 소설 『한티재 하늘』(1998)에서 이름을 따왔다. 한티재 사무실 지하 공간은 물레책방이 자리 잡고 있다. 녹색평론이 서울로 이사 가기 전까지 사무실로 쓰던 곳이다. 권정생의 『한티재 하늘』을 녹생평론사에서 출간했으니 권정생을 중심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인연들이 작용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개인적으로 나 자신도 물레 책방 주인이며 독립영화 감독인 장우석 씨가 진행하는 권정생 문학기행에 따라나선 인연이 있다.
은종복은 현재, 제주도에서 책방을 운영하고 있다. 그런 즉, 서울의 오래된 책방은 결국 문을 닫게 되었다는 얘기다. 풀무질 간판을 내렸다는 소식을 듣고, “바른 세상을 만들기 위해 열심히 살았는데 / 그 끝이 폐업”(「풀무질 서점」 중)이라며 김용락 시인이 아쉬움을 토로한 것은 평소 권정생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동지의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용락은 『우리들의 하느님』 원고를 모아 책을 내게 한 장본인이다. 김용락의 권정생 이야기는 이 글 말미에 만나게 될 것이다. 책방이 좋았던 시절이 있었을까 싶지만 낙양의 지가가 옛말이 된 지금, 지역의 작은 책방들이 풀무질 그 이상으로 오래오래 버티라고 종을 울려서 소원하고 싶은 마음이다.
권정생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권정생 관련 이야기만 나와도 흐뭇해한다. 이 글은 권정생을 이야기하는 시편들을 모아서 그의 가난하고 아름다운 삶을 떠올려보려는 뜻이 있다. 권정생을 모르는 사람에게 약간의 안내가 되고, 권정생을 좋아하는 사람끼리 괜히 반가운 마음이 드는 글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안동, 조탑동, 일직 교회, 종지기, 빌뱅이 언덕, 오두막, 뺑덕이, 폐결핵, 오줌주머니, 몽실언니, 강아지똥, 한티재 하늘, 밭 한 뙈기, 수상 거부, 북한 어린이 돕기, 유언, 이오덕, 이원수, 전우익, 정호경, 이현주, 이철수, 김용락, 안상학……. 권정생 하면 우선적으로 떠올려지는 이름들이다. 이 중 종지기로서 권정생을 기억할 사람도 적잖을 듯하다.
종지기 이전의 생도 간단하지 않지만 대강 줄이기로 한다. 권정생은 아버지와 뒤이은 어머니의 도일로 일본에서 태어났다. 10살 무렵, 전쟁을 피해 아버지 고향인 안동 일직면으로 돌아왔지만, 5년이 지나지 않아 한국전쟁을 겪는다. 일직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과정을 밟고 싶었으나 형편이 되지 않았고 늑막염에 결핵을 앓고 난 후, 어머니의 지극한 간호가 있었지만 가족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 떠돌이 생활도 마다하지 않는다. 어머니 아버지를 차례로 여의고, 동생마저 결혼해 나가면서 혼자가 되었다.
서른 즈음의 권정생은 조탑동 마을교회 문간방에 기거하면서 종을 치기 시작해서 종이 차임벨로 바뀔 때까지 종지기로서 교회 일을 거든다. 권정생은 새벽 4시와 오후 6시, 하루 두 번 종을 치고, 한 번에 예순 번이 넘도록 종을 쳤다. 종을 칠 땐 한겨울에도 장갑을 끼지 않았다. 종이 울리게끔 힘을 전달하는 줄을 잘 다루기 위한 것도 있지만 성스러운 일을 한다는 마음이 있어서다. “깨끗한 하늘에 수없이 빛나는 별들과 종소리가 한데 어울려 더없이 성스럽게 우주의 구석구석까지 아름다운 음악으로 채워지는 순간”(「새벽종을 치면서」 중)이라고 했으니 목동과 스테파네트 아씨가 함께 쳐다본 별하늘 못잖다. 물론, 권정생에겐 스테파네트가 없다. 아니, 있어도 자신의 건강 상태를 생각하며 사랑의 마음을 애써 지우려고 했을 것이다. 이충렬은 『아름다운 사람 권정생』(2018)을 쓰며 결혼할 뻔도 했던 두 사람의 인연에 대해서 소개했다. 권정생과 가까운 사람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대리 결혼 신청을 받은 장영자 전도사 얘기다. 그녀는 권정생에게 직접 청혼을 듣고 싶다고 했고, 권정생은 끝내 그 말을 내지 못했다.
이성의 사랑을 말하는 대신, 권정생은 불치병을 가진 아랫마을 아이가 건강해지기를, 혼자 외롭게 주무시는 산 아래 할머니가 무탈하기를, 전쟁이 없기를, 굶주림도 없기를 매번의 종소리에 맞추어 기도했다.
그 종소리에 일찍 주목했던 시인 중에 신경림이 있다. 신경림은 몸이 불편한 또래의 권정생 대신 위로 10살 터울이 나는 전우익과 어울려 경북 북부 지역을 구석구석 다니기도 했다. 전우익의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1993)는 신경림이 소개글을 썼고, 전우익의 두 번째 산문인 『호박이 어디 공짜로 굴러옵디까』(1995)는 출간 이후 권정생에게 서평을 부탁할 일이 있었나 보다. 고흐의 그림책을 선물로 들고 온 전우익을 반기다가 감상글 얘길 듣고 공짜가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는 권정생의 말이 서평에 남아 있다. 권정생의 『우리들의 하느님』이 방송국 선정 도서가 되어 책이 많이 팔릴 기회도 있었다. 한두 번의 상을 부득불 받은 걸 제외하고 모든 상을 거절한 이력답게 권정생은 선정 도서에 드는 것을 극구 싫어했다. 그런 까닭에 권정생 대신 전우익의 책이 대신 추천되었다는 얘기도 있지만, 전우익이나 독자 입장에서는 선정될 만했으니 선정된 거라고 해야겠다.
1984년 안동 어디에선가 찍은 사진 한 장엔 전우익, 권정생, 이오덕이 화단 턱에 나란히 걸터앉아 있다. 소설가 김영현으로부터 영남 삼현으로 불리기도 했던 세 사람이 함께 찍은 유일한 사진이란다. 전우익과 권정생은 잠바 차림이고 이오덕은 양복 차림이다. 전우익과 이오덕은 운동화를 신었고 중간에 권정생은 고무신을 신었다. 권정생은 얼굴에 웃음을 머금고 있는데 좋아하는 형님들 사이에서 약간 우쭐하는 모습이다. 이제 이 낡은 사진 한 장도 울리지 않는 종소리처럼 아득하다. 신경림의 「종소리」는 “안동의 동화 작가 권정생 씨에게”에게란 부제를 달고, 일상의 권정생을 불러낸 것이다. 이제 옛날의 일이 되었지만 귀를 닫지 않으면 종소리가 가까이 들릴 것이다.


과수원 사과나무에 가려 탑이 반밖에 안 보이는
산모롱이 개울가 외진 곳집 옆
궤짝 같은 두 칸 집이 그가 혼자 사는 집이다.
맨드라미가 핀 손바닥만한 마당에서
개와 토끼가 종일 장난질을 치고
학교에서 돌아오는 아이들은 떼로 몰려
질퍽질퍽 물을 밟고 개울을 건너
주인이야 있거나 말거나
젖은 발로 방에 들어가 엎드려 동화를 읽는다.
늦어서 아이들이 함께 먹는 밥은
그가 생활보호 대상자라고
면에서 나오는 쌀로 지은 것이다
밤이 되면 그는 마을 안 교회로
종을 치러 간다 그 종소리를 들으면서
사람들은 오늘도 무사히 넘겼음을 감사하지만
그 종소리를 울면서 듣고 있는 것들이
따로 있다는 것을 그들은 모른다.
버러지며 풀 따위 아주 작고 하찮은 것들
하지만 소중한 생명을 지닌 것들이
종소리를 들으면서 울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 「종소리」 전문


권정생을 자신이 일부러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소설가, 시인, 동화 작가, 수필가를 겸했다. 아이들을 사랑하고 단편동화를 100편 이상 쓴 것을 생각하면 동화 작가가 제일 어울릴 듯하나, 『몽실 언니』, 『한티재 하늘』 등에서 보여준 서사의 재미와 감동을 생각하면 소설가로 부르지 않는 게 유감일 수 있다. 안상학은 『한티재 하늘』의 주무대인 삼밭골 일대를 소개하는 글에서 “무엇 하나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이 서로 다독이며 어떻게든 살아보려는 장면 장면마다 가슴부터 벅차올라 눈물이 그냥 흘렀다”(『권정생의 삶과 문학』 중)며 감동을 전하기도 했다.
권정생의 흙담집엔 좁은 방에도 책이 많아서 교회 아이들과 동네 아이들이 수시로 책을 빌리러 다녔다. 옆에 곳집(상엿집)이 있어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여느 농촌처럼 아이들이 성장해서 인근 도시로 떠나고 다시 돌아오지 않으면서 적막해지긴 했을 것이다. 거지 생활까지 견딘 권정생의 삶은 말할 것도 없겠지만 실제 권정생의 집을 출입했던 대개의 아이들도 가난하고 상처 입고 그러면서 자존심은 셌다. 권정생의 동화는 이 아이들이 현실의 고통과 직접 마주하며 몹시 부대끼는 상황을 묘사하면서도 더 나은 세상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는다는 느낌을 준다. 이 점은 동화를 읽으면서 독자 스스로 따져보면 좋겠다.
신경림 시인이 말처럼 권정생은 생활보호 대상자로 얼마간 지냈다. 건강상의 이유로 생계를 이을 특별한 직업을 갖기 어려웠기에 최소한의 도움을 받은 것이다. 한 달에 한 번씩 일직면 운산리 면사무소 앞마당에서 쌀 배급을 받을 수 있었는데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린 끝에 운이 좋으면 빈 포대에 쌀 8킬로그램을 받을 수 있었다. 책이 팔리고 인세가 들어오면서 권정생은 생활보호대상자에서 면제된다. 권정생은 홀가분한 기분을 느끼면서도 배급 받던 그 자리에 그 사람들과 함께 있지 못함을 미안하게 여겼다. 면사무소에서 운산역 방면으로 나설 것 같으면 우체국이 보인다. 북한 어린이를 돕는 데 쓰라는 그 10억 인세가 저축된 통장이 여기 있었을 것이다. 큰 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권정생은 가난한 삶을 전혀 바꾸지 않았다. 전우익의 말에 의하면 돌아가신 어머니에게 미안해 방에서 쌀밥도 못 먹는 위인이었다.
종소리를 들으면서 울고 있었을 것이란 마지막 시 구절에서 박지원이 요동 벌판을 지날 때 한바탕 통곡할 만한 자리라고 했던 말이 생각난다. 박지원은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고 견문을 넓히는 데 욕심낸 사람이다. 그런 그가 눈에 가리는 것 하나 없이 탁 트인 지경을 처음 보았을 때 저도 모르게 낸 소리인데 결국, 기쁜 마음이 극에 달해서 우는 것이라고 했다. 종소리를 들으면서 벌레나 풀이 우는 것도 그런 것이 아닐까. 남들이 보기엔 “아주 작고 하찮은 것들”로 보이더라도 소중하지 않은 생명은 없고 그런 생명이 살아갈 하루하루는 고단하면서도 늘 새로운 것이다. 흔한 듯해도 귀하지 않은 날이 없고 슬픈 듯해도 복되지 않은 날이 없다. 종소리가 이를 일깨워주니 하루를 시작하는 매일매일의 고마움이 사무쳐 우는 것이다. 극은 극끼리 통한다는 말을 빌릴 거 같으면, 너무 좋아서 슬프고, 그토록 슬퍼서 좋기도 한 마음을 이해 못할 것도 없다.
아마도 신경림은 권정생이 작고 하찮은 것에 마음을 쓰고 있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을 것이다. 시집 후기로 밝힌 신경림 자신의 시론도 이와 같다. “시의 값은 오히려 본질적으로 작고 하찮은 것, 못나고 힘없는 것, 보잘것없는 것들을 돌보고 감싸안고, 거기에 그치지 않고 스스로 낮고 외로운 자리에 함께 서”는 것이라고 했다. 신경림도 그러했겠지만 권정생은 작고 낮은 것을 받들면서 자신도 그렇게 살고자 했다. 교회 문간방을 나오면서 동네 가장자리 빌뱅이 언덕에 기대어 지은 흙담집은 권정생과 참으로 어울리는 작은 집이다. 신경림은 “궤짝 같은 두 칸 집”이라 했지만 그 한 칸은 거의 통로에 가까운 수준이다. 김용락은 토끼장에 견주기도 했다. 뒷날 신경림처럼 종소리에 주목했던 박남준 시인은 “마주 앉을 자리도 없던 손바닥만 한 쪽방”으로 표현한다.


거스름돈, 주머니에 넣은 동전이 흔들릴 때면
이명처럼 어디에서 누가 종을 치는가
애기똥풀이 필 때면
흰씀바귀꽃 목 긴 꽃그늘이 바람에 흔들릴 때면
낮은 곳으로 마른 대지를 적시며
세상의 가장 낮은 곳으로 엎드려 흐르는 강물
강물을 따라 걷다가 당신이 거기에 있었음을
아니 바로 강물이었음을
이제야 비로소 알았습니다

당신 떠나시고 시절은 더욱 난장판입니다
어지러운 이 봄날 당신의 푸른 종소리가 그립습니다
세상의 종지기였던 이여
몽실언니를 만나보셨겠지요 그곳에선
옆구리에 구멍을 뚫어 매달던 고무관도 없이 훨훨 자유롭겠지요
마주 앉을 자리도 없던 손바닥만 한 쪽방
거기 나란히 앉아 말 없는 안부를 나누던 날을 기억합니다
수줍음 많은 소년 같은 미소를,
아니다라고 단호하게 내리치던 그 곧고 강직한 정신을,
먼 데서 온 벗을 마중하거나
혹은 해질 무렵 들풀 우거진 작은 마당을 서성였을
댓돌 위 보랏빛 고무신 한 켤레를
누옥 같은 내 삶의 선반에 얹어놓아봅니다
살아 세상의 고통받는 아이들에게 당신을 온통 아낌없이 나누시던
아름답고 깨끗한 가난을 떠올립니다
다시 태어난다면 건강한 스물다섯 청년의 몸으로
벌벌 떨지 않고 연애를 해보고 싶다는 연분홍빛 소원도 말입니다

꽃과 나무들의 초록으로 환한 오월
인디언들은 오월을 오래전에 죽은 사람이 생각나는 달이라 했다지요
오래오래 생각나겠지요
오래오래 당신의 손때 남겨놓은 것들 향기롭겠지요
오래오래 아주 오래 말입니다

- 「푸른 종소리가 그립다」 전문


모악산에서 지리산 쪽으로 이사한 박남준 시인은 2004년 도법 스님, 수경 스님, 이원규 시인 등과 함께 ‘생명평화탁발순례’에 참여했다. 지리산에서 제주도를 거쳐 전국을 걸으며 생명과 평화를 일상 문화로 바꾸자는 운동으로 2008년 사대강 사업에 반대하는 ‘생명의 강을 모시는 사람들’ 순례로 자연스레 이어졌다. 2005년 가을엔 도법 스님 일행이 권정생의 오두막을 찾기도 했다. 이때 박남준 시인은 참여하지 않은 걸로 보인다. 도법 스님은 누구보다 생명과 평화를 소중하게 여기고 실천을 말해왔던 권정생과 인사를 나누고 싶었을 것이다, 순례단에 대한 격려를 받으려는 뜻도 있었을 것인데 예상치 않게 “걷는다고 생명이 살아나나요?”라는 말을 듣는다. 당황했을 도법은 혼자 못하는 일은 여럿이 함께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말을 건넨다. 뜻을 같이하면서도 실천의 방식이 달랐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권정생이 던진 말이 당신의 속내 그대로라고 보긴 어렵다. 사람 만나는 것을 힘들어하고 수줍음을 심하게 타는 권정생인 만큼, 개인 방문도 아니고 많은 사람들과 촬영 팀이 갑작스레 닥친 것에 대해서 혼란스러운 마음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사정을 겉으로 드러내기 꺼리는 성정이다 보니 순례단의 깃발이나 규모만 보고, 언짢은 마음이 더해져 일부러 어깃장을 냈는지 모른다.
박남준은 “나 내딛는 한 걸음이 이 땅의 강을 살리는 일”(「강물을 따라 흐르네」 중)로 생각하고 기꺼이 탁발순례나 사대강 사업 반대에 동참했으며 이런 생각은 권정생도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권정생을 바라보는 박남준의 눈도 신경림의 눈을 떼다 붙인 것 같다. 권정생에게서 마른 것들을 적시며 “세상의 가장 낮은 곳으로 엎드려 흐르는 강물”의 미덕을 본 것이다. 강줄기처럼 생명과 평화를 품은 권정생은 집 마당의 풀 하나도 함부로 솎지 않았고, 방안에 든 쥐에게도 이부자리를 내주었던 사람이다. 박남준은 자기 방에 든 쥐에 식겁하며 쥐덫과 끈끈이를 준비하면서 권정생에게 자신이 못 미치는 것을 말한 바 있다. 그런 그도 계곡의 버들치를 벗하며, 매운탕거리를 생각하는 몹쓸 사람들에게 자신이 버들치 주인이라며 실랑이를 했다고 하니 작고 하찮은 것들의 생명까지 위하는 마음이 꼭 닮았다.
“옆구리에 구멍을 뚫어 매달던 고무관도 없이 훨훨 자유롭겠지요”라는 표현에서 보듯 권정생은 결핵 후유증으로 수술 끝에 신장과 방광을 잘라내고 고무관이 연결된 오줌주머니를 차고 다녀야 했다. 고무관이 막히기 전에 매번 갈아주어야 하는 일을 권정생은 평생 혼자 해냈고 그 과정에 통증이 심할 때는 하루 이틀 고열에 시달리며 아무것도 못하고 누워 있어야 했다.
권정생의 몸상태에 대한 안상학 시인의 언급도 눈에 띈다. 안동이 고향인 안상학은 권정생의 양아들로 불릴 만큼 권정생을 따랐다. 또한 안상학은 연상의 박남준과도 죽이 잘 맞는 사이로 알려져 있으니 먼 데서 오는 그를 기다렸다가 권정생의 오두막으로 안내했을 것이다.


권정생 선생은 평소 자신의 몸 상태를
멀쩡한 사람이 쌀 석 섬 지고 있는 것 같다 했다

개구리 짐 받듯 살면서도
북녘에서 전쟁터에서 아프리카에서
굶주리는 아이들 짐 덜어주려 했다 그리했다

짐 진 사람 형상인 어질 仁
대웅보전 지고 있는 불영사 거북이
짐 진 자 불러 모은 예수

세상에는 짐을 대신 져주며 살았던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삶은 하나같이 홀가분했다

- 「쌀 석 섬」 전문


안상학 시인은 자신이 위로 쳐다보고 살 분으로 이육사 시인과 권정생 딱 두 분을 꼽는다. 이육사와 권정생은 삶과 정신과 문학이 일치된 대표적 문인들이다. 위 시에서 권정생은 자신의 몸이 불편한 정도를 쌀 석 섬 지고 있는 것에 견주었다. 웬만한 장사라도 고꾸라지기 좋은 무게다. 실제로, 수술 이후의 권정생은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권정생의 작품은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불안감 속에 그 시한부가 조금씩 연장되어 오면서 하나 둘 결실한 것이다. 평생을 병고에 시달린 권정생을 생각하면 자신의 진 짐이 오죽할까 싶은데 그런 중에도 남의 짐까지 기꺼이 지려고 마음을 내며, 유작이 될지도 모를 작품들을 매번 내면서 조금씩 반향을 넓혀온 것이다.
안상학의 마음에 권정생의 문학과 삶이 담기면서 그는 누구보다도 부지런히 오두막을 출입하며 인연을 쌓는다. 잘 나가고 영향력 있는 모습이 아니라 오히려 궁기가 돌며 병약하고 어수룩한 모습에 스스럼없이 다가서는 사람들도 이미 권정생류라고 말할 수 있겠다.
위 시에서 쌀 석 섬의 무게를 굳이 수치로 환산할 필요는 없다. 우리말의 도량형은 그 길이나 무게나 부피가 정밀하지 않은 게 특징이기도 하다. 어림으로 매기면서 셈이 흐린 만큼 인정에 따라 양을 더하거나 덜어내기도 한다. 한 섬은 한 말의 열 배로 부피의 의미가 강하지만 저울에 달거나 지게에 질 경우엔 무게로 실감한다. 섬이나 가마니는 짚으로 만든 용기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한 섬, 두 섬 혹은 한 가마, 두 가마 식으로 수로 헤아리기도 한다. 한 가마를 한 섬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지역에 따라선 두 가마를 한 섬으로 간주한다. 권정생도 도량형에 대해 한말씀 한 바 있다. 웬만한 길이나 무게는 손대중, 눈대중으로 어림잡았던 전통을 말하며, “사람 마음이 넉넉하자면 도량형의 눈금부터 넉넉해져야 한다”( 『우리들의 하느님』 중)고 했다. 실제, 중학교 입학할 돈을 마련하기 위해 고구마 가게 점원으로 일하면서 주인의 뜻에 따라 저울 눈금을 속인 일을 권정생은 아프게 떠올린 적이 있다. 심지어 가게에 온 어머니에게조차 속인 눈금을 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그 괴로움으로 일을 그만두었다는 것이다.
안상학이 보는 권정생은 부처나 예수가 그랬듯이 남의 짐을 자기 짐으로 기꺼이 진 사람이다. “짐을 대신 져주며 살았던 사람들”의 삶이 홀가분해 보이긴 하지만 그 어질고 간소한 삶이 그냥 생길 리 만무하다. 남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면서 자신과 관련된 이익과 불행엔 마음을 적게 쓰려는 의식적인 노력과 성찰이 따르지 않으면 안 될 일이다.
안상학은 어질 인(仁)을 사람이 짐을 진 모습이라고 보았다. 실제 갑골문의 사람 인(人)은 사람 옆모습을 닮았다. 보기에 따라 얼굴을 유난히 들고 있는 모습 같기도 해서 어질 인을 두고, 위든 아래든 똑같은 얼굴로 대하는 거라는 해석도 있다. 개인적인 생각을 보태면, 사람이라면 하나의 생각에 갇히지 않고 자신과 남, 위와 아래, 이쪽과 저쪽으로 나누어 둘을 함께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는 의미로 새기고 싶다. 따지고 보면 전쟁이란 것도 남을 생각하지 않고, 위아래를 평등하게 보지 않고, 저쪽을 충분히 헤아리지 못하여 생기는 경우가 많다. 권정생은 뼛속까지 반전평화주의자다. 이 점은 권정생을 기억하는 권오삼 시인의 시에서도 확인된다.


약속한 대로 안동 버스터미널 앞에서 형을 기다렸다.
이마 아래까지 푹 눌러쓴 운동모
보라색 고무신에 무릎자리가 불룩 튀어나온 옅은 밤색 바지
소매를 팔목 위에다 아무렇게나 둘둘 말아 붙인 체크무늬 남방셔츠 차림의
시골 노인이 내 앞으로 허적허적 다가왔다.
형이었다.
이때가 형이 세상을 뜨기 2년 전인 2005년 4월이었으니
그날이 형과 함께한 마지막 추억이 되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중국은 티베트를 독립시켜야 하고
미국은 이라크에서 철수해야 하고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에 대한 무력사용을 중지해야 하고
전쟁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일어나서는 안돼.
내가 동화를 몇 십 년 썼지만 세상은 하나도 달라진 게 없어, 동화를 써도 아무 의미가 없어
전화로 안부를 물을 때마다 형은 내게 참 많은 이야기를 했다.

2000년 2월, 설 직후였든가
내가 안부전화를 했을 때 형은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했다.
쉬엄쉬엄 늘어놓는 말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내 아픈 것 아무도 몰라, 안 아파본 사람들이 어떻게 아픈 사람 심정 아노, 이렇게 살다가 죽어야 하는 게 억울해.
그날 그렇게 곧 죽을 것처럼 말하던 형이 그 이후로 참 용케도 잘 버티기에
혼자 속으로 75세까지는 너끈하겠다 믿었는데
작년 5월, ‘나 정말 이제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훌쩍, ‘어머니 사시는 나라’로 가버리는 걸 보고
한동안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해 마음고생을 한 건 사실이다.
그 이후로 내가 죽음에 대해 자주 생각을 하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형의 죽음으로 말미암은 후유증이라고 할 수 있다.

- 「권정생 형」 전문


권오삼은 1980년대 중반부터 이오덕, 권정생을 알고 지냈으며, 이오덕을 도와 한국어린이문학협의회(1989) 창립에 관여했다. 권오삼은 권정생을 형이라 부르며 따랐고, 권정생은 권오삼의 2시집인 『가시철조망』(1995)에 발문을 쓰기도 했다.
권오삼은 전화로 안부를 물으며 권정생의 생각을 듣는다. 권정생은 쪽방에 앉아서 지구 공동체 전체의 평화를 걱정한다. “이 지상에서 정의로운 전쟁이란 절대 없습니다”(『우리들의 하느님』 중)며 힘센 강자가 자연계의 질서를 마구잡이로 어지럽히며 우주의 악마가 되고 마는 것이니 이를 바로잡아야 지구의 종말을 피할 수 있다고 했다. 이라크를 침공하여 불바다를 만든 미국도, 티베트 독립을 무장 응징한 중국도, 팔레스타인에 수시로 화력을 쏟아붓는 이스라엘도 권정생이 보기엔 정의를 가장한 자국이기주의에 불과한 것이었다. 무엇보다 아무런 죄 없는 아이들이 전쟁 소용돌이 속에 부모를 잃고, 팔다리를 잃고 평생 고통에 시달리게 될 것을 걱정한다. 한국의 이라크 파병 결정에 권정생은 크게 노여워하기도 했다. 전쟁과 그 후유증에 대한 권정생의 걱정은 임종 직전까지 계속된다.

“하느님께 기도해 주세요. 제발 이 세상 너무도 아름다운 세상에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일이 없게 해달라고요. 재작년 어린이날 몇 자 적어놓은 글이 있으니 참고해 주세요. 제 예금통장은 다 정리되면 나머지는 북쪽 굶주리는 아이들에게 보내주세요. 제발 그만 싸우고, 그만 미워하고, 따뜻하게 통일이 되어 함께 살도록 해주십시오.
중동, 아프리카 그리고 티베트 아이들은 앞으로 어떻게 하지요.” (2007년 3월 31일)

정호경 신부에게 쓴 마지막 편지 내용의 일부다. 이전에 쓴 유서와 함께 또 하나의 유서로 언급되기도 한다. 자신의 몸이 망가지는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북쪽의 아이들과 중동, 아프리카, 티베트의 아이들 미래를 걱정하고 있으며, 인세가 고스란히 담긴 통장을 아이들을 위해 쓸 것을 당부하고 있다.
권정생은 분단이 고착되는 현실을 “미친 상태”로 표현하며 답답해했다. “우리들의 현실, 옛날에도 그랬지만 너무도 어둡구나. 어떻게 휴전선이라도 틔워져야만 최소한의 인간으로서 살 수 있지 않을까? 지금 우리는 모두가 미친 상태야. 부디 우리 적은 숫자의 인간끼리라도 시대의 아픔을 함께하자꾸나. 그러면, 나는 외롭지 않다. 안녕!”이란 편지 내용은 권오삼에게 보낸 것이다. 권정생이 보기에 권오삼은 그 적은 숫자의 인간에 속하는 사람인 것이다. 다수가 힘을 보태러 올 때까진 소수의 사람끼리라도 연대해서 통일운동을 해야 할 거라는 권정생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권정생은 『몽실 언니』, 『초가집이 있는 마을』, 『점득이네』에서도 전쟁의 슬픔을 다루며 그 슬픔을 극복하는 길로 통일을 제시한다. 『몽실 언니』에서 몽실이와 이웃들의 비참한 삶의 배경엔 한국전쟁이 있다. 권정생은 작가의 말을 통해서 『몽실 언니』 이야기가 통일의 밑거름이 되고 전쟁을 지나온 어린이들에게 위안이 되기를 바랐다. 『초가집이 있는 마을』의 아이들도 전쟁으로 인한 상처를 온몸으로 겪는다. 복식이란 아이는 월북한 아버지에게 총을 겨눌 운명을 괴로워하며 자살을 선택한다. 남북 대결에 동참하는 자체가 남이 만들어준 올가미에 치여 죽는 어리석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싸우려면 올가미에 묶어 공갈치는 몰이꾼을 향해 싸워야 한다는 유서를 남기고 정작 자신은 싸우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소설 속 북쪽 출신의 아저씨는 통일이 될 때까지 유랑할 생각이었으니 죽어서나 유랑을 멈췄을 테다. 분단 70년을 헤아리고 다시 또 헤아려야 할 세월에 대해선 저승에서라도 통곡하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권정생은 『점득이네』 서문을 통해, 통일 전까지는 잘산다거나 행복하다는 말을 쓰지 말자고까지 얘기했다.
권정생이 주소지를 옮겨 갔다는 ‘어머니 사시는 나라’는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이 가득한 생전의 헌시이기도 한데 그 일부만 보자.


아아, 거기엔 배고프지 않았으면
너무 많이 배고프지 않았으면
너무 많이 슬프지 않았으면
부자가 없어, 그래서 가난도 없었으면
사람이 사람을 죽이지 않았으면
으르지도 않고 겁주지도 않고
목을 조르고 주리를 틀지 않았으면
소한테 코뚜레도 없고 멍에도 없고
쥐덫도 없고 작살도 없었으면

-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는」 부분


이 땅에서 배고팠고, 추웠고, 고되게 일만 했고, 눈물 흘릴 때가 많았던 어머니가 저쪽 세상에서는 그렇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뭉클하게 전해져 오는 시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지 않았으면”에서 보듯 어머니 사시는 나라엔 전쟁이 없어야 한다. 평화로운 시절을 만나, 어머니랑 함께 외갓집 가고 남사당놀이 구경 가는 소소한 일상이야말로 권정생이 후생에 미뤄둔 소망 목록인 셈이다.
부자와 가난한 자를 가르는 것도 권정생은 못마땅하다. “기름진 고깃국을 먹는 뱃속과 보리밥 먹는 뱃속의 차이로 인간의 위아래가 구분지어지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것”(『우리들의 하느님』 중)이라고 말하는 권정생은 평등주의자이기도 하다. 남보다 더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애쓰는 사회에서 평등은 난망하다. 고깃국과 이밥에 대한 욕망을 버리고, 함께 배부르지 못할 바에는 보리밭을 나누어 먹는 가난한 삶을 선택할 때 평등은 훨씬 더 가까이 다가올 텐데 권정생은 평생 그런 삶을 지향했다.
권정생을 생태주의자로 보는 시각도 상당한데 소에게도 쥐에게도 미치는 사랑을 말하는 모습에서 그런 성향이 잘 드러난다. 권정생은 인간뿐만 아니라 자연에 속한 것도 공동체의 일부로 보았다. “밭 한 뙈기 / 돌멩이 하나라도 / 그건 ‘내’ 것이 아니다. / 온 세상 모두의 것이다.”(「밭 한 뙈기」 중)라는 시구에 권정생이 생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시는 이오덕 묘지에 시비로 남아 있기도 하다. 쥐덫이 없기를 바라는 권정생의 말에 박남준 시인은 꽤나 찔렸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남의 진정이 담긴 말에 자신을 돌아볼 줄 안다는 점에서 박남준 역시 지구 살림에 도움 되는 생태주의자의 길을 걷고 있을 게 틀림없다. 쥐에게도 미안해하는 사람들이 모여 살면 지구를 오염시키거나 남을 해롭게 하는 일을 만들지 않을 것이다.
권정생의 사람들 중에 이현주 목사는 권정생과 흉허물 없이 지냈고, 이현주는 판화가 이철수를 데리고 권정생에게 간다. 권정생과 이현주와 이철수는 각별한 정을 나누며 삼형제라 불릴 만큼 가까이 지냈다고 한다. 또한, 권정생의 양아들로 불린 안상학이 있다고 했는데 김용락 시인이 여기에 끼지 못하여 섭섭해 할 수 있으니 이때 양아들은 김용락과 안상학, 둘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두자. 또 다른 사람이 서운해할지에 대해선 나는 모르는 일이다. 김용락은 시와 산문을 통해 권정생에 대해 가장 많이 얘기했던 사람이다. 『나의 스승, 시대의 스승』(2008)에서 첫 번째로 권정생을 언급한다. 『조탑동에서 주워들은 시 같은 않은 시』(2008)에선 권정생의 육성이 담긴 6편의 시를 선보였다.


이오덕 선생 2주기가 갓 지난 8월 말
조탑동 오두막 처마 뜰까지
서산 해 그림자가 가득했다
이오덕 선생이 권정생 선생에게 이렇게 말씀했단다

“권 선생은 정말 결혼 잘 안 했어요
결혼은 무지개 같은 거라 잠깐 아름다웠다가
평생 고생이라요
여자는 100프로 허영덩어리라요”

권 선생님 그 말 받아서
“여자만 그러니껴 남자도 그렇지요”

이오덕
“남자는 99프로가 그렇고 1프로는 안 그런 사람도 있어요”

권정생
“아마 이오덕 선생님은 자신이 그 1프로라고 생각했는지
(동시 웃음)
톨스토이 부인 일기가 발견됐는데
매일 톨스토이 욕으로 도배를 했대
간디 부인은 간디가 모금한 물품 가운데
목걸이 하나를 안 준다고 그렇게 화를 내기도 했다네”

- 「조탑동에서 주워들은 시 같지 않은 시 2」 전문


197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무명저고리와 엄마』를 좋게 읽은 이오덕은 작가를 찾아 조탑동 교회로 온다. 권정생은 이날의 만남 이전에 이미, 있는 그대로의 삶을 진실되게 써야 한다는 이오덕의 문학관에 크게 공감하고 있었다.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서로의 인격과 글을 존중하며 죽는 날까지 편지와 속마음을 주고받으며 의지하는 사이가 된다. 특히, 위로 띠동갑인 이오덕은 가난과 병고로 글 쓰고 책 낼 형편이 안 되는 권정생을 위해 출판사를 알아봐주고 원고료를 챙겨주려고 애쓰며, 전우익, 이현주 등 평생의 지기를 소개시켜 준 은인이기도 했다. 신세 지기를 유난히 싫어했던 권정생이 이오덕의 도움을 받아들인 것은 그만큼 이오덕이 권정생을 이해하고 지지해주었기 때문이기도 하겠다.
이오덕은 고집이 세고 매사에 진지했다. 『우리글 바로 쓰기』와 『우리 문장 쓰기』는 그런 고집과 집념의 산물이다. 권정생 역시 고집이 만만찮았으나 실없는 농담도 곧잘 했기에 주변 사람들은 권정생을 다소 편하게 대했다. 위 시에서도 이오덕과 권정생이 재미나게 대비된다. 여자가 100프로 허영덩어리란 얘기는 이오덕의 소신이 아니라, 권정생을 만나 혼자 사는 처지도 위해 줄 겸 평소 그답지 않게 말의 재미를 준 것이다. 여자만 아니라 남자도 그렇다며 이를 받아치는 권정생의 말이 더 그럴듯하지만 이오덕은 살짝 물러서서 1프로의 남자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여운을 남긴다.
뒷날 이 말을 옮기면서, 아마도 이오덕이 스스로 1프로에 든다고 여겼을 거라고 천연스레 전하는 권정생의 표정은 짓궂은 아이 같기도 했겠다. 이오덕이 자신의 무덤 비석에 권정생의 시를 가져갔을 때도, “내가 자기 마누라인가”라며 투덜거린 일도 듣는 사람에겐 저절로 웃음이 나는 장면이다. 실제 상대를 흠잡는 말이라면 오히려 불편했을 텐데 이오덕의 성정까지 떠올리고 추억하는 애정이 담겨 있으니 편하게 웃게 된다. 참된 의리는 그 사람의 됨됨이를 가슴으로 품고, 사소한 것은 사소한 대로 지나게 하는 여유가 있을 때 주어지는 것이다. 권정생의 글들이 어둡고 슬픈 이야기가 많지만 그럼에도 사랑받는 이유 중 하나는 슬픔 속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고 더 나은 상황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아서다.
앞서 정지아가 읽고 울었다는 유서 첫 부분은 사실, 유서를 보고 유서 내용을 이행해줄 세 사람을 특정하는 얘기로 시작된다. 먼저 언급된 이는 최완택 목사다. “이 사람은 술을 마시고 돼지 죽통에 오줌을 눈 적은 있지만 심성이 착한 사람”이니 믿을 만하다는 거다. 정지아는 이 한 줄만 읽고도 고인의 따스한 인간애가 뭉클 와 닿은 것이리라. 이처럼 몸이 아파 죽음을 예감하면서도 권정생은 세상에 농담을 건네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오덕의 임종 후 권정생은 추모 편지에서 “먼 산길로 선생님이 걸어가시는 뒷모습이 먼저 떠올랐습니다. 한 쪽 손에 두툼하게 싼 책보자기를 들고 한 쪽 어깨엔 느슨하게 끈 달린 가방을 메고, 선생님은 그렇게 산길 모퉁이를 걸어 사라지셨습니다.”(2003년 8월 25일)라고 적는다. 권정생이 이오덕을 추억하며 책보자기를 떠올렸듯이 안상학과 권오삼은 권정생을 추억하며 보라색 고무신을 떠올린다. 권정생이 어떤 연유로 보라색 고무신을 신게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이 궁금증이 권정생의 글이나 권정생을 아는 사람들의 말과 글을 통해 나중에라도 풀리게 되기를 바란다. 이렇듯 고무신 하나에도 마음을 쓰는 건 좋은 사람의 영향을 좀 더 받고 싶어서다. 좋은 사람을 자꾸 따라하면 그 사람도 그리된다는 말을 믿는다. 권정생 주변에 사람들이 떠나지 않고 그의 문학과 삶을 말하고 싶어 하는 이유도 여기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 중에 김용락 시인은 좀 더 특별할지 모르겠다. 김용락은 종종 주위 인물을 시적 대상으로 삼는다. 이야기 형태로 풀어쓴 한 편의 시에 연민과 유머가 섞여 있는데 권정생의 영향도 아주 없다고 할 순 없겠다. 첫 시집 이후, 김용락이 낸 네다섯 권의 시집에 권정생 이야기가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나온다는 사실은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다. 만 스물 한 살의 김용락이 자전거에 수박 한 통을 싣고 조탑동 교회 문간방을 찾으면서 시작된 인연이다.


의성 단촌리 출신, 스물한 살의 문청인 김용락
도서관에서 『까치 울던 날』(1979)을 읽으며
교회 종지기인 동화 작가가 고향집 인근 사람인 걸 안다.
김용락은 자전거에 수박 한 덩이 싣고 가서
입성 초라하고 머리카락 듬성한 사십 대 중반의 권정생을 만난다.
김용락이 랭보를 말할 때 권정생은 광주를 말하고
수박에 답하듯 『사과나무밭 달님』(1978)을 건넨다.
동화 속 달님은
본 적 없는 아버지의, 소식 없는 남편의 그리운 얼굴이지만
김용락의 달님은 권정생 얼굴이다.
사과나무밭 지나 조탑동 교회 문간방으로
오층전탑 곁을 지나 빌뱅이 언덕 오두막으로
혼자서도 가고 식구 데리고도 간다.
첫 시집 『푸른 별』(1987)을 낼 때 권정생으로부터
영원히 소년처럼 깨끗할 듯싶은 시인이란 발문을 받고
다다음 해엔 첫 딸 이름을 받고
딸의 친구 삼으라고 강아지 죽딕이 밥딕이도 받는다.
나중엔 구박까지 받아가면서
권정생이 따로 챙기지 않은 글들을
애써 모으고 묶어서 『우리들의 하느님』(1996)도 낸다.
돈이 안 된다는 이유로
조탑동 가는 길, 사과나무 뿌리째 뽑혀나가더니
돈이 있어도 남북 어린이 몫으로 돌리고
끝내 가난한 삶을 바꾸지 않던 권정생도
평생의 병치레를 끝내고 어매 곁으로 간다.
임종을 지킨 김용락은
살던 흔적을 남기지 마라는 유지는 차마 받지 못하고
일없이 빈 오두막에 앉아
『조탑동에서 주워들은 시 같지 않은 시』(2008)를 받아 적는다.
『강아지 똥』(1974)이 민들레 몸 되고
한 거름이 한 걸음 되고
잘 묵힌 거름이 바른 생을 돕고, 바른 생은 바른 생을 부른다.
사과나무 꽃 없는 밤하늘에
김용락의 자전거가 수박 한 덩이 싣고 간다.

- 졸시 「권정생과 김용락」 전문

두 사람의 인연을 졸시로 스케치해두며 권정생을 사랑한 사람, 그 끄트머리에 별 인연도 없는 내 이름자 적는 시늉을 해본다.
다음에 조탑동 빈집에 들르면 빌뱅이 언덕에 올라 한티재 하늘이 어느 쪽인지 어림잡아봐야겠다. 집 마당에 원종찬에게 씹어 보라는 박하 이파리가 있는지, 신경림이 보았다는 맨드라미 흔적을 찾을 수 있는지도 살펴봐야겠다. 때를 놓쳤다고 서운해할 것은 없다. 빌뱅이 언덕에 뿌려진 권정생의 유골처럼 이 아름다운 것들이 강아지 똥과 함께 거름이 되는 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순정한 일일 테니까.

- 끝 -


- 월간 '우리시' 2019.12.


<인용 시 출처 및 참고 서적>

「종소리」 (『길』, 신경림, 창비, 1990)
「푸른 종소리가 그립다」 (『그 아저씨네 간이 휴게실 아래』, 박남준, 실천문학사, 2010)
「쌀 석 섬」 (『그 사람은 돌아오고 나는 거기 없었네』 ,안상학, 실천문학, 2014)
「권정생 형」 (원종찬, 『권정생의 삶과 문학』, 창비, 2008)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는」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는』, 권정생, 지식산업사, 1996
「조탑동에서 주워들은 시 같지 않은 시 2」 (『조탑동에서 주워들은 시 같지 않은 시』, 김용락, 문예미학사, 2008
「권정생과 김용락」 (이동훈)

『하염없이 낮은 지붕』, 김용락, 천년의시작, 2019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박준, 문학동네, 2012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박준, 난다, 2017
『책방 풀무질』, 은종복, 한티재, 2018
『나의 스승, 시대의 스승』, 김용락, 솔과학, 2008
『권정생의 삶과 문학』, 원종찬, 창비, 2008
『아름다운 사람 권정생』, 이충렬, 산처럼, 2018
『작은 사람 권정생』, 이기영, 단비, 2014
『초가집이 있던 마을』, 권정생, 분도출판사,1985
『몽실 언니』, 권정생, 창비, 2001
『천국의 이야기꾼』, 정지아, 실천문학사, 2012
『호박이 어디 공짜로 굴어옵디까』, 전우익, 현암사, 1995

『우리들의 하느님』, 권정생, 녹색평론사, 1996(개정판, 2008)
『점득이네』, 권정생, 창비, 1990(개정판, 2012)
『한티재 하늘 1,2』, 권정생, 지식산업사,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