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책)

<여행 산문> 남미히피로드

톰소여와허크 2020. 2. 14. 13:08




노동효, 『남미히피로드』, 나무발전소, 2019.

- 히피는 1960년대 후반 미국을 중심으로 기존의 가치관,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자연적인 삶과 자유와 평화를 추구했던 세대에 붙여진 이름이다. 스스로 자유로운 삶을 살고자 하는 방랑자 기질, 음악과 예술을 사랑하는 보헤미안적 기질을 두루 갖추고 있다. 저자가 남미에서 주로 만난 친구들이 히피족이고, 그 친구들의 눈에 비친 저자의 모습도 그러했을 것이다.
조금 별난 점이 있다면 저자는 독서 경험을 바탕에 깔면서 여행 기록을 꾸준히 남긴다는 것이다. 관광지 설명 위주의 글과 구별되는 글쓰기로 원고료를 받기도 하지만, 이도 저도 어려우면 농장 일을 거들거나 서커스 기예를 익혀 여행비 마련에 도움을 받는다. 산 너머 물 건너 세계에 대한 동경을 동경으로 끝내지 않고 세상 구경에 직접 나서는 것도 신나는 일이지만, 그 과정에 생긴 배움과 경험을 공유하는 일도 멋진 일이다. 그 신나고 멋진 장면 속으로 잠깐 들어가 보자.
우루과이를 찾았을 때, 저자는 부패지수가 낮은 나라에 일조한 무히카 전 대통령의 삶을 떠올린다. 관저를 노숙자에게 내주고 자신은 시골집에서 국정을 보며 틈틈이 농장에서 일했다는 대통령이다. 물질적 풍요보다 삶을 누릴 수 있는 시간이 중요하다고 했던 무히카의 말을 인용하는 저자도 이미 그런 삶을 살고 있는 듯하다. 저자는 이다음의 더 나은 공동체를 위해 부패를 줄이는 게 관건이란 생각을 갖고 있다.
에콰도르 키토에서 강도를 만나 현금과 사진기를 다 잃고 낙담과 분노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저자는 마음을 수습한다. 예정했던 일정이 바뀌면서, 우연찮게 국제방랑서커스단의 일행이 된다. 각각의 사연을 지닌 히피 친구들과 우정을 나누며 선한 영향을 주고받는 잊지 못할 경험을 하게 되면서 강도에 대한 미움을 더는 여유를 갖게 된다. 좋은 친구들을 거듭해서 사귈 수 있는 이유에 대해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남아메리카에서 누구를 만나든 소설에서 나온 주인공이라도 만난 것처럼 대했다. 그러면 진짜 소설 같은 일들이 벌어졌다”고. 히피 친구들을 생각하며 저자가 떠올린 책은 헤르만 헤세의 <크눌프>다.
<나는 오직 네 모습 그대로의 널 필요로 했었다. 너는 나를 대신하여 방랑했고 안주하는 이들에게 자유에 대한 그리움을 일깨워주었다>는 대사를 히피들을 위한 위로이자 저자 자신의 삶에 방향을 준 말로 소개한다. 크눌프의 외로운 죽음을 부각해서 이전의 방랑을 후회하는 내용을 담았다는 일부 평자들의 윤리적 해석이 없는 건 아니지만 실제 크눌프에 매료되는 이유는 젊은 날의 방랑 그 자체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방랑에서 생산적이고 의미 있는 것을 건진다는 자세도 취할 만하지만 그게 지나치면 실망도 빨리 올지 모르는데 저자는 그 경계에서 자연스러워 보인다. 오늘도 가뿐하게, 히피가 해피로 읽히는 그 길을 걷고 있을 것이다. (이동훈)




'감상글(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설> 당신들의 천국  (0) 2020.03.03
<소설> 노트르담의 꼽추  (0) 2020.02.20
<에세이> 강을 버린 세상에서 살아가기  (0) 2020.01.20
<에세이> 나답게 산다  (0) 2020.01.19
<소설> 기억과 몽상  (0) 2019.1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