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책)

<소설> 당신들의 천국

톰소여와허크 2020. 3. 3. 18:41




이청준, 당신들의 천국, 문학과지성사, 1976.

 

 

- 1910년부터 외국인 선교사를 중심으로 한센병 환자를 격리 수용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소록도는 혐오와 금기의 땅이 된다. 1940년 일본인 원장의 지휘로 삼 년 여의 공사 끝에 완공된 중앙공원은 지금도 아름다운 공간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 과정에 환자들이 강제 노역에 시달렸고, 수시로 감금실에 갇히거나 단종 수술이 강행되었다. 뒤에 일본인 원장의 동상까지 만들게 되나 원한을 품은 환자에게 원장은 살해된다. 이 일화는 소설 속 새로 부임한 원장(조백헌)에게 동상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전하는 이상욱의 이야기로 재현된다.

1945년에 직원들에게 원생들이 집단적으로 항거하는 일이 일어났고 진압 과정에 84명의 희생자를 내기도 했다. ‘전라도 길이 실린 한하운 시초1949년 간행된다. 문둥이 시인으로 알려진 한하운에 대해선 소설에서 다루지 않고 시비(詩碑)가 있다는 정도로 짧게 지나간다.

1966년 이규태 기자는 소록도의 반란이란 제목으로 오마도 간척사업에 관한 르포를 사상계에 발표하고, 르포를 읽은 이청준은 고향 장흥 마을의 이야기이며 초등학교 때 소풍 다니던 소록도 이야기를 그때부터 구상하게 되어 10년 후, 당신들의 천국으로 발표하게 된다.

원장 조백헌은 섬 바깥 사람이고, 이상욱은 섬 안에 한센병 환자 사이에서 자라다가 음성 판정을 받고 직원으로 일하는 사람인데 둘은 섬을 위하고 싶다는 진정을 갖고 있으면서도 조금씩 어긋난다. 조백헌이 헌신적으로 하는 일이 결국 자기 동상을 세우는 일이 될 거라는 경고를 끊임없이 이상욱은 보낸다. 조백헌이 다른 원장보다 동상을 끝까지 견디려는 마음을 냈다는 점을 섬의 노인에게 인정받으며 동상 이야기는 일단락되지만 조백헌은 섬사람들의 미움과 원망과 의심의 깊은 골을 메우지 못하고 결국 바깥으로 나가고 만다.

조백헌은 섬의 건강 지대와 병사 지대를 갈라놓은 철조망을 없애고, 음성인 환자와 뭍에서 건강한 여자의 결혼을 이끌어냄으로써 완전한 화해를 눈앞에 둔 고매한 인격자로 보인다. 표면적으로론 그렇다는 얘기인데 작가는 이상욱의 편지를 통해 또 다른 면을 보게 한다.

 

원장님께서 저들에게 만들어주시려는 천국이야말로 결국은 돈 없는 자에겐 돈으로, 병을 앓는 자에겐 건강으로 각각 그의 천국을 삼게 하는 것 이상의 뜻을 지닐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그 가난한 자와 병을 앓는 자에게, 가난하고 병을 앓을망정 아직도 차마 눈감아버릴 수 없는 뜨거운 진실과 인간적인 소망이 살아남아 있는 한, 그 진실과 소망 그리고 그 인간에 대한 오만스럽고도 난폭한 테러 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울타리가 둘러쳐진 천국이 진짜 천국일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문둥이를 위한 문둥이만의 천국을 꾸미시려는 원장님의 의지 바로 그것 속에 이미 그 보이지 않는 철조망은 마련되고 있습니다

 

여기에 보태, “원장님의 천국이 섬사람들에게도 천국일 수 있는 것은 원장님의 천국의 윤리에 섬사람들의 생각이나 욕망이 스스로 한정당하고 익숙해지기 시작할 때뿐이었습니다. 다스리고 다스림을 받는 일이 짐승의 굴레처럼 다스림이 편할 때 다스림을 받는 것도 편해지는 이치의 비밀은 여기에 있습니다라고 했다.

이상욱의 이런 태도는 열심히 일하는 자에게 막연하고 모호하게 딴지를 거는 행위로 비치기도 하고 거꾸로 행위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부정적인 기운을 파악하고 경계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두 사람의 입장 차이가 소설의 주된 내용이고 모호한 차이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힘이 작가의 필력이란 생각이 들지만 그게 지나쳐 사변적인 느낌도 없지 않다.

 

소설의 마지막은 조백헌이 결혼식에 대어가기를 지체해가면서까지 축사를 미리 읽어보는 장면이다. “이 섬 안엔 건강 지대와 병사 지대가 따로 없는 하나의 마을로 채워지기를 빕니다. 이제 두 사람으로 해서 그 오랜 둑길이 이어지고 길이 뚫렸습니다. 그리고 당신들의 이웃은 힘을 합해 그 길을 지키고 넓혀나갈 것입니다…….”라는 구절은 조백헌 정도의 사람만 남길 수 있는 말로 자연스럽게 지나면 그만일 대목이지만, 작가는 굳이 자신의 광기에 못 이긴 기이하고도 진지한 연기라는 단서를 남긴다. 두 사람의 결합이 갖는 의미를, 바다를 간척지로 만든 자기 공과 연결하는 데서 동상의 유혹이 되살아나기도 하는 것이다.

앞서 두 사람의 입장 차이와 별개로 제 삼의 시선도 있을 수 있겠으나, 어느 쪽이든 진실의 전부를 가질 수 없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언제 소록도와 이청준 생가를 함께 둘러보면 좋을 것이다.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