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책)

<산문집> 젖은 손으로 돌아보라

톰소여와허크 2020. 5. 3. 20:19




황동규, 젖은 손으로 돌아보라, 문학동네, 2001.

 

 

황순원의 아들인 황동규 시인은 마해송의 아들 마종기와 중3 때 만나서 고등학교 동창이 되어 평생의 친구로 지내고 있다.

애초에 의대를 생각했던 마종기와는 달리, 고등학교 시절 시집 한 권 분량의 시를 갖고 있었던 황동규는 고민이 깊다. 진로와 관련된 내용을 옮겨 적는다.

 

그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던 러시아 작가 안톤 체홉이 의사 공부를 했지만 결국 의학을 포기하고 글만 썼다는 사실이 자꾸 생각나 하룻밤을 꼬빡 새웠다. 의사 일을 보면서도 좋은 시를 쓴 시인 윌리엄 카알로스 윌리엄즈가 그때 미국에 살고 있었다는 사실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고민 끝에 비록 고난의 길일지라도 문학 외곬의 길을 택하기로 마음을 정하고 말았다. 그 순간의 비정함이란! 그리고 다음날 아버님을 만나 그 말씀을 드렸다. 그 무엇보다도 문학에 약하셨던 아버님은 조금 생각에 잠기시더니 하고 싶은 대로 해보라고 하셨다. 그리고 덧붙여서 후회 없이 살 용기만 있다면 무슨 일을 해도 좋다고 하셨다. 나는 그 말을 지금 내 자식에게도 하고 제자에게도 하고 있다

 

윌리엄즈는 소아과 의사로 있으면서 자신이 사는 동네 이름을 붙인 패터슨시집을 5권 출간했다. 여기에 영감을 받아, 버스기사로 시를 쓰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영화 <패터슨>(짐 자무쉬 감독, 2016)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마종기도 미국에서 의사 일을 하면서도 10여 권 이상의 시집을 내며 문명을 떨치고 있다. 허만하, 송재학, 노태맹, 김완…… 얼핏 떠오르는 의사 시인도 적잖으니 문학 외곬이 아니더라도 문학을 가까이하며 지낼 수 있었을 것이다. 생각하기에 따라선 문학에 자신을 던진다는 각오를 가진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에 온도 차는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학이 삶의 투영인 것을 생각하면, 문학 그 자체와 문학 외적인 것을 구별하는 태도가 꼭 바람직해 보이진 않는다.

황동규 시인이 그러했듯 진로를 결정하는 선택의 순간, 부모의 기대, 금전, 미래 가치, 자신이 좋아하는 것, 자신이 잘할 수 있는 것 등에 대한 고려가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그러니 후회 없이 살 용기가 쉽게 주어지리란 계산은 버리는 게 낫겠다. 경험적으로도 봐도, 후회 없는 삶은 없다. 다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했을 때 후회의 정도가 적으리란 생각은 든다.

이 책의 곳곳은 여행의 기록이기도 하다. 황동규 시인은 여행을 자아의 거듭나기로 인식하며, 여행을 호기심과 관련짓는다.

 

호기심이 없다면 자기 삶의 결핍을 아프게 느낄 수 없을 것이며, 그 결핍된 삶으로부터의 탈출을 위한 적극적인 시도도 없을 것이다. 하긴 보통의 삶에서 주어진 대로 사는 것처럼 더 편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불편하게 살려고 나는 시인이 되었다. 새로운 세상, 새로운 감각, 새로운 인간의 모습을 찾아, 다소나마 그 새로운 모습의 인간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나는 시를 써왔다.”

 

이 책을 읽으며 문득 드는 호기심 하나는, 마종기 시인이 생각하는 황동규는 어땠을까 하는 점이다. 그럼, 또 관련 산문집을 뒤적여야 할 텐데, 그 전에 두 사람의 시를 좀 더 읽어보는 게 순서일 것이다.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