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원,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문장사, 1938. / 휴머니스트, 2020.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읽고 박지원의 행로를 똑같이 따라 가기란 평생의 과제이거나 불가능에 가까워 보이지만,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을 읽고 구보 씨의 동선을 따라가는 건 마음만 먹으면 오늘이라도 가능하겠다. 도보로 두세 시간 남짓이면 된다.
소설 속 구보 씨는 작가 박태원의 분신에 가까워 보인다. 종로네거리에서 시작된 구보 씨의 여정은 화신상회(종로타워)를 지나, 전철을 타고 경성역(서울역)에 이른다. 경성역 인근의 다방에서 벗을 만나고 헤어지고, 광화문으로 이동해서 또 다른 벗을 만나 다방과 술집을 전전한다. 이때 술집까지 동행한 벗은 아마도 절친 사이인 이상일 가능성이 높다. 작가 이상과 화가 구본웅은 광화문 인근에 집이 있었다. 실제 박태원은 이들과 수시로 어울렸다. 이 소설이 신문에 연재될 때 삽화를 그려준 이도 이상이다. 소설 속 벗(이상?)은 ‘음주불감증’을, 구보는 ‘다변증’을 앓으며 조금씩 정신이상 증후가 있다고 소개된 걸 보면, 박태원이 동료들 사이엔 꽤 말수가 많은 사람임을 짐작케 한다.
구보 씨는 남보다 공부도 많이 하고 동경 유학까지 다녀온 지식인이지만 특별한 직업을 갖지 못한다. 어쩌다 들어온 원고료는 생활의 방편이 못 된다. 경제 불황 속에 나름의 양식을 지키려 했던 식민지 하의 지식인들이 보편적으로 겪던 고통으로 이해하고 있다. 생활이 이러하니 답답한 처지에 있는 비슷한 벗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는 날이 잦았다.
경성역 대합실에서 자신보다 잘날 게 없던 옛 친구가 비싼 시계에 아름다운 애인을 둔 것을 보고 돈 때문일 거라고 여기며, 그렇게 여기는 자신을 질책하기도 한다.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돈에 걸신이 걸렸누?”라는 자조 속에 어떻게든 자존을 지키려는 가난한 소설가의 마음이 엿보인다.
『날개』의 이상이 미쓰코시(현재 신세계백화점) 옥상에서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구나’ 외쳤듯이 박태원은 종로네거리에서 ‘이제 나는 생활을 가지리라’는 구보의 다짐으로 소설을 마무리 짓는다. 실제, 1934년, 신문 연재가 끝나자마자 박태원은 김정애를 배필로 맞이하여 오남매를 낳아 기르며 소설 속 구보 씨가 그렇게 원했던 행복을 채워갔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가 몸담았던 구인회 멤버 중에 이상, 김유정, 이효석 등은 6.25 전에 폐를 앓으며 쓰러졌고, 정지용과 김기림은 전쟁 중에 사망했을 것으로 짐작하며, 이태준과 박태원은 북을 선택해서 이 땅에서 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전쟁 통에 박태원은 큰딸만 데리고 가족과 헤어졌으니 박태원의 가계는 이산가족의 큰 아픔이 있다. 박태원의 둘째 딸은 2남 2녀를 두었는데 막내가 봉준호 감독이다. 봉준호 감독의 입심은 농담처럼 다변증을 얘기했던 외할아버지를 닮았을 것이다. 남쪽의 김정애 여사는 남편만 기다렸지만, 박태원은 북에서 권영희(남편 정인택은 월북 직후 사망)와 재혼하고 실명 상태에서 권영희의 도움을 받아 『갑오농민 전쟁』을 썼다. 박태원이 임종을 앞두고 ‘통일’이란 두 글자를 남겼다는 얘기가 전한다.
소설 내용으로 돌아가, 전차 안에서 일 년 전에 선 봤던 여자를 만났을 때 구보 씨의 마음 씀이 인간적으로 와 닿아 메모해 둔다.
1. 여자와 시선이 마주칠까 겁을 낸다.
2. 여자가 자기를 알아보았을까, 그렇다면 자신에 대한 인상을 어떻게 간직하고 있을까 궁금해한다.
3. 서로가 서로를 의식하고 있다면 자신이 어떤 태도를 취하는 게 맞는지 고민한다.
4. 여자는 하차 준비를 하고, 구보는 여자가 내릴 때 따라 내릴 것인지, 그걸 여자가 어떻게 생각할지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다.
5. 여자는 동대문에 내려 멀어져간다. 자신이 그렇게 바라 마지않는 행복이 떠나가는 거 아닌가 아쉬워한다.
소설 속 구보 씨는 늘 노트를 갖고 다닌다. 일상으로 접하는 일에 타인과 자신을 관찰하며 그걸 어떻게든 기록해보려는 박태원의 작가정신을 느낄 수 있다. 서울에 가면 종로네거리에 오래 머물게 될 거 같다. (이동훈)
* 사진은 구본웅 아버지가 운영했던 창문사에서 (이상, 박태원, 김소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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