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어머니, 서울에 눈이 내렸어요 / 김서나

톰소여와허크 2020. 5. 7. 00:10


어머니, 서울에 눈이 내렸어요 / 김서나

 

 

이렇게 밤새워 흰 눈이 내린 걸 알았을 땐 덜컥 눈물이 났어요

따뜻한 남쪽 나라에 누워 계신 어머니가 생각나서요

김이 오르는 따신 밥상을 내려놓으시며

어머니 당신은 이렇게 말씀하시고는 하셨죠

 

아이고! 오늘은 억수로 추운 날씨다 영하 1도란다

라디오에서 그러는데 서울에는 눈까지 온다네

그러니까 너희도 오늘 어디 나갈 생각 마라!”

당신은 오늘도 라디오에서 서울의 눈 소식을 들으셨나요?

영하 1도가 아니라 영하 7도인 걸 아신다면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시겠지요

아마 누워있는 어머니의 빈약한 가슴엔 소리 없는 눈덩이가

집채만큼 쌓여가고 있을지도요

펑펑 쏟아지는 흰 눈을 어머니는 평생 몇 번을 보았을까요?

따뜻한 남쪽 나라에도 한 번은 큰 눈이 내렸던 걸 기억해요

 

마당 한 귀퉁이에서 집을 지키던 불도그 천둥이가 쇠사슬에

묶인 자기 집을 매달고 집을 탈출한 사건이 있었던 날이었어요

힘센 천둥이가 제 몸집보다 큰 개집을 끌고

밑동 잘린 배추밭을 대책 없이 미쳐 날뛸 때

놀란 어머니도 덩달아 그 작은 몸집으로

풀쩍이며 뛰어다니셨어요

 

잡히지 않으려는 천둥이와 어떻게든 끌고 오려는 어머니와의

실랑이 사이에 흰 눈은 방앗간 백설기마냥 쉼 없이 내렸어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저는 육각형 눈 입자 모양으로

배를 쪼그라트리고 깔깔 웃었어요

 

왜 그리 대책 없이 웃음이 나던지...

 

그때 제 웃음소리가 어머니 귀에까지 들리지 않았기 망정이지

천둥이와 씨름하며 식은땀을 흘리는 어머니를 보면서

좋아라 낄낄대는 제 모양 샐 보기라도 하셨다면

이렇게 밤새 눈이 내려 꼼짝달싹 못하고

집 안에서만 틀어박혀있는 제게,

어머니는 분명 이렇게 말씀하셨을 거예요

 

아이고 꼬시다 내가 니 까불 때 알아봤다!”

 

어머니는 오늘도

서울의 눈 소식에 영글지 못한 자식 걱정에

눈사람 몇 개는 세우고도 남을 눈덩이를

밤새 이리저리 구르고 계시지는 않으신지요?

 

-마리 마리 어디 있어 어디 있어?, 현대시학사, 2020

 

 

감상 눈 오는 날, 개가 평상시보다 많이 설치는 이유에 대해서 이런저런 말들이 있다. 발이 시려서 그렇다는 얘기는 동화적으로 들리지만 좀 진부하다. 시력 문제로 흑백으로만 세상을 보는 개가 전에 없는 백색의 춤사위에 흥분해서 그렇다는 얘기가 과학적 해석으로 들리지만 꼭 그렇다는 보증은 없다. 개뿐만 아니라 아이들도 눈을 반기는 걸 보면, 낯설고 신기해서 그럴 거도 같지만 이 또한 재미있는 해석은 못 된다. 배고픈 기억을 새겨둔 몸이, 내리는 눈을 먹을거리로 인식하고 저도 모르게 혀를 내밀게 되는 거라고 나는 잠깐 생각해본다. 스스로도 미덥지 못한 발상이지만 그런 억지도 평범보다 나을 수 있다. 특히 문학에선 그렇다.

일상은 대개 심심하다.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을 재현하는 데만 충실한 작품이라면 흥미도 반감될 게 뻔하다. 문학을 업으로 하는 사람은 일상의 반복 속에서도 평상시와 다른 조짐과 사건과 변화를 읽고 이를 포착해서 의미화해두는 일이 긴요해 보인다. 김서나 시인은 눈 오는 날, 개 도주 사건을 잘 간직해두었다가 시로 풀어냈다. 개 도주 사건 중에서도 손가락에 꼽을 만한 극적 요소를 다 갖추고 있다. 남쪽에선 드문 함박눈이 내리고, 개는 집을 달고 눈밭에서 널뛰기를 하고, 어머니는 개를 데려오기 위해 땀을 빼고 있다. 이런 장면만으로도 웃음을 머금고 지날 수 있지만 시인은 여기에 눈덩이를 얹어서 무게를 갖게 한다.

첫 번째 눈덩이는 몸이 아파서 누워있는 어머니의 빈약한 가슴에 쌓인 눈덩이다. 두 번째 눈덩이는 자식 걱정과 연결된다. 그 희생과 걱정 덕에 험한 꼴 덜 당하고, 사람 꼴 갖춰 사는 거라고, 평범한 자식들은 그렇게 여기며 산다. 옛 추억을 바탕으로 덩이덩이 영글어 가는 것은 북쪽에 사는 자식과 남쪽에 사는 어머니가 서로의 안녕을 걱정해주는 마음이겠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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