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의 편 / 장인수
사람들은 끊임없이 묻는다
너는 누구 편이냐 너는 어느 진영이냐
나는 내 삶의 편이다
내 삶은 명랑의 편이다
명랑은 슬픔의 편이다
나의 노래는 명랑하다
명랑한 목소리로 슬픔을 부른다
못을 들고 형형색색 그림을 그려도 슬픔의 편, 슬픔의 채색
한 끼 밥에서도, 한 잔 술에서도 슬픔을 뜬다
내 마음 속 진보, 내 행동 속의 좌파는 오직 슬픔
슬픈 자들을 위해 시를 쓴다
슬픈 자들은 웃음과 명랑과 정력과 성욕조차 슬프다
내가 믿는 예수와 부처는 좌파, 진보, 사랑, 아픔
그리고 슬픔의 하나님이듯이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너는 누구 편이냐
어느 쪽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슬퍼하는 자의 삶, 슬픔의 편이다
썩은 해초처럼 삶을 휘감는 슬픔
열대어처럼 무리지어 골목을 휘젓는 슬픔의 편이다
- 『천방지축 똥꼬발랄』, 달아실, 2020.
감상 –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예수가 남긴 마지막 말씀 중의 하나로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선 이 구절을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로 적고 있다. 하나님 앞에 평등한 사랑을 말했던 예수를 로마 당국과 유대 제사장은 끝내 수용하지 못하고 극형으로 다스렸다. 예수가 기득권과 주류에서 벗어나 소외된 사람들 즉 ‘슬픔의 편’을 들었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슬픔의 변(말)’을 토해낸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전염병 속에 사지로 들어가서 봉사하는 의료진, 노동 차별을 반대하며 고공 농성을 하는 사람, 자신의 것을 나누어 남을 돕는 데서 보람을 느끼는 사람들도 내가 보기엔 다들 슬픔의 편이다. 크든 작든 스스로 십자가를 진 사람이다. 시인도 자신이 슬픈 자들을 위해 시를 쓰는 ‘슬픔의 편’임을 못 박아 얘기하지만 애초엔 ‘명랑의 편’이라고 말한다. ‘명랑’은 흐린 데 없이 밝고 환하다는 뜻이다. 자신이 추구하는 명랑이 이웃의 흐림 속엔 결코 있을 순 없다는 인식이 분명해졌을 때, 비로소 명랑과 슬픔은 연결된다.
시인이 좌파와 진보 쪽에 자신을 두는 이유도 그 운동성 때문일 것으로 짐작한다. 우파와 보수는 자유를 기치로 내세우면서도 안정과 질서를 강조하는 면이 있다. 자신이 사는 세상이 불공정과 차별과 그로 인한 슬픔이 여전히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평등을 지향하며 변화와 개혁을 내세우는 진보 쪽을 거들고 싶을 것이다. 물론, 진보가 변화의 동력을 잃으면 보수가 되고, 보수 안의 혁신이 곧 진보이기도 하다.
무리지어 골목을 휘젓는 슬픔에서, 슬픔보다 명랑을 더 크게 읽는다. ‘슬픔의 평등한 얼굴’(정호승)을 보아서 일 수도 있겠고, 똥꼬발랄에 감염된 이유도 있을 것이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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