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죽 / 허림
오죽 뿌리로 만들었다는 펜을 선물 받았다
뿌리까지 검은 오죽
겉과 속이 다르지 않은 일심동체가 맘에 들었다
퍼뜩 떠오른 생각이 오죽의 끝에서 까맣게 흘러나왔으면 했다
때로는 뜻대로 글이 되지 않았다
어쩌다 한 문장이 오래 맴돌다 나오기도 했다
두루치기에 모주 한잔을 하니 애인이 그리웠다
오랜만에 애인은 흠뻑 땀을 흘렸고
바람에 흔들리는 오죽의 대궁을 움켜잡고
가늘게 몸을 떨었다
뿌리 마디마디 연민으로 쟁여놓았던 사연들이 흘러나왔다
마디의 삶은 어둠처럼 깊고 고요했다
흔들리거나 소리 내어 우는 까닭을 거침없이 받아주었다
오죽하면 병처럼 깊어진 연민을 들여다보다가
눈에서 멀어지고 마음도 멀어진
사랑하는 이에게 편지를 쓴다
그리워하는 것은 근원이 없네
다만 마음에 두지 않으리니
-『누구도 모르는 저쪽』, 달아실, 2020.
감상 : 강릉 오죽헌은 주변에 오죽이 많아서, 율곡의 이종사촌인 권처균이 자신의 호를 오죽헌으로 지은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오죽은 뿌리와 줄기가 검은빛이 도는 대나무다. 2020년 올해 오죽헌의 오죽이 무더기로 꽃을 피워 화제가 되고 있는데, 대략 60년 주기로 꽃이 핀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오죽 뿌리로 만든 펜을 선물 받은 시인은 그 펜을 만지작거리며 이 시의 초고를 다듬고 있는 중이었을 것이다. 펜은 쓰라고 있는 것이니, 귀한 선물을 보내준 사람의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오죽 펜에 어울리는 명품을 건져야 한다는 부담도 없지 않다. 주인의 속을 태우고 모주 도움까지 받아서야 펜촉은 드디어 글을 내놓는다. 그 글은 일심동체의 부부 이미지와 관능적인 애인의 이미지를 동시에 입지만 마디마디 “연민으로 쟁여놓았던 사연”도 함께 품는다. 숱한 사연과 굴곡을 지나서 마침내 얻어낸 몇 줄의 글이 곧 애인의 실체이기도 할 것이다.
이 시에서 오죽 펜이 써 나간 구절은, “그리워하는 것은 근원이 없네”라는 문구다. 그리움은 그 뿌리에 가 닿기도 어렵고 그 정체가 모호할 때도 있다. 어디서든 물줄기를 내며 달려드는 그리움에 불가항력으로 휩쓸릴 때도 있다. 시인이 여기에 마음을 두지 않겠다는 것은 일차적으론 평정심을 가지려는 태도로 보이지만 이를 시작(詩作)과 연결하면 감정의 소모와 거리를 두며 긴장 관계를 잃지 않으려는 의지로도 이해된다.
60년 만에 꽃을 피운 오죽처럼 누구든 한 번은 활짝 피고 싶은 꿈이 있겠지만, 꽃을 간직하고 있다는 그 자체로 매일매일을 설레도 좋을 것이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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