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자두밭 이발소 / 송재학

톰소여와허크 2020. 11. 15. 12:53

자두밭 이발소 / 송재학

 

 

금성이발(金星理髮) 문 열었구나

자두밭 출입문이 또 바뀌었다

이발(理髮) 다음 글자는 지워졌지만

붉은 金星理髮은 비 젖어 선명하다

얼기설기 거꾸로 매단 문짝 그대로

금성이발 문 열었네

봄비에 들키면서 왔다

첫 손님으로

오얏나무 의자에 앉으니

키 작은 아가씨들, 단내가 싱숭생숭하다

푸쉬킨의 시를 읽는 시간에 맞추어

자두애나무좀벌레 있다는

금성이발 문 열었구나

자두 꽃잎 사이 면도날 재우면

내 가잠나룻이야 금방 파릇해지지

자두 아가씨 속눈썹 이윽하니 이 몸의 퇴폐 데우겠다

잔무늬청동거울이라 내 새치마저 숨는구나

자두비누 자두 샴푸에

두피까지 시원한 이발이다

요금도 없이 외려 자두 한 움큼 받아오니

밀레의 만종이 반가운

금성이발 문 열었네

멀리 시내 갈 필요없다

집 옆 자드락 공터에 자두이발소 생겼구나

염색 꼭 하세요

아내의 신신방부와 함께

일요일마다 자두잼 바른 빵 먹고

이슬바심 이발하게 되었네

금성이발 문 열었구나

 

- 내간체를 얻다, 문학동네, 2011

 

 

감상 : 이발하러 동네 이발소를 찾는 대신 시인은 자드락(산기슭의 비탈진 땅) 공터를 찾는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이슬로 머리카락이 촉촉해지긴 하지만 시인의 두발은 원상태를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도심 생활에 갑갑증을 느끼는 사람들이 하천부지나 야산 기슭에 허가 혹은 무허가로 텃밭 농사지으며 소일하는 모습은 낯설지 않다. 시인이 주말마다 재미를 내서 찾는 자두밭도 그런 곳일 테다. 비탈진 땅이지만 비슷한 취미를 가진 이웃과 경계를 분명히 할 필요가 생기면 줄도 치고 문짝도 해단다. 공터에 버려진 폐자재로 대충 모양새만 취하는 것인데 예의 금성이발 문짝은 면목 없이 자두밭 입구에 거꾸로 달리기까지 한다. 여기에 시인의 상상력이 더해지면서 아주 특별한 이발소로 재탄생하는 장면을 만나게 된다.

푸시킨의 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와 부부가 농사일을 끝내고 저녁 기도를 올리는 그림인 밀레의 <만종>은 이발소에 흔하게 걸려 있었던 시와 그림이다. 푸시킨을 읽고, 밀레를 반가워하는 데서 시인이 이들을 좋아하고 있다는 느낌도 받는다. 자두 이파리가 면도날이 되어 시인의 가잠나룻을 정리해주는 표현도 재미난다. 구레나룻이 두드러진 푸시킨에 비해 송재학 시인은 단정한 편인데 가잠나룻은 짧고 성기게 난 구레나룻이란 뜻이니 푸시킨과 자신을 이으면서도 차별화하는 묘미가 있다.

시인은 금성이발에 자두애나무좀벌레가 있다고 굳이 한 마디 하고 지나간다. 나무좀은 나무를 해치는 곤충이지만 이름이 자두애니 자두를 사랑하는 것인지, 자두를 애먹이는 것인지 괜히 묻고 싶어진다. 이발과 면도를 하기 위한 거울도 예사롭지 않다. 잔무늬청동거울은 가는 선으로 그은 세모, 네모, 동그라미 등 여러 무늬로 장식된 거울이다. 자두밭에서 청동거울을 찾는 데 시간을 허비할 필요는 없다. 문짝처럼 누가 버린 물건이 아니라, 기하학적 무늬로 반지르르한 자두 알이 곧 예스런 청동거울이다. 있는 그대로 정밀하게 다 비춰주는 게 거울의 미덕이 될 수 없다는 건 불문가지다.

밀레나 고흐의 그림이 그렇듯이 금성 이발소에서 아름다움을 느꼈다면, 전체적으로 그러한 인상이 들게끔 세부에 신경을 쓰고 정성을 들였기 때문인 줄을 알겠다.(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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