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봉건, 『시를 찾아서』, 문명사, 1968
- 전봉건 시인은 1928년 생이다. 일본어로 교육받고 사고하며, 해방 후 한글을 새로 배워야 했던 세대라고 김현은 『시인을 찾아서』(1975)에서 말했다
비슷한 제목의 『시를 찾아서』는 1968년에 나왔으니 시론에 관한 책이 많지 않았던 시절, 주의를 끌만한 책이었을 것이다. 그와 논쟁이 있었던 김수영은 1968년 6월 교통사고를 죽었으니 이 책을 읽진 못했겠다.
전봉건은 시라는 것이 1+1=2의 세계가 아니라, 1+1=0이거나 1+1=3인 세계라고 다소 장황하게 설명한다. 계산이 서지 않을 만큼 개성과 상상력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로 읽힌다. 시의 현실 참여를 고민하는 김수영과 각을 세우면서 자신의 이론을 심화시켜 나갔을 걸로 보인다.
전봉건은 바흐를 좋아한다. 그의 형인 전봉래가 피난지 부산의 스타 다방에서 바흐 음악을 들으며 음독자살했다. 대구 르네상스 다방에서 디제이를 보기도 했던 전봉건은 예서 전봉래의 벗이었던 김종삼에게 바흐의 레코드를 선물받기도 한다.
전봉건은 바흐의 음악을 듣고 정신병원에서 광증을 보이는 사람들이 평정을 찾고 잠을 청하는 기사를 책에 인용하며, “사람은 모두 언제건 자기 외부에 걸쳐진 거울에 비쳐 볼 수 있는 아름다움, 쾌락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인은 이 사실을 어떠한 상황에 있으면서도 믿고 확인하는 노력을 계속할 뿐만 아니라 그 능력을 영원히 지키면서 노래하는 사람인 것입니다”라고 했다.
박재삼, 김종삼, 고은 세 사람의 시를 인용하며 ‘티끌만한 틈도 없이 째여진 시’로 소개한다. ‘째여지다’는 말은 허술하거나 빈틈이 없이 일정한 격식이나 체계에 꼭 들어맞게 되다는 뜻으로 북한 사전에 올라와 있는 말인데 전봉건은 이러한 째여진 시를 위해선 언어에 대한 철저한 싫증과 방황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독자와 시의 관계를 돈 판(돈 후안?)과 그의 성적 대상인 여인과의 관계로 비유하는 건 지금으로 봐선 무리하고 부적절한 표현이다. 하지만 아래와 같은 문장은 좋게 읽힌다.
“악보를 볼 줄 모르는 사람이더라도 음악을 좋아해서 음악을 오래 들은 귀이면, 가령 바흐의 「두 개의 바이올린을 위한 합주곡」의 경우, 전축에서 멀리 떨어져 앉아 있으면서 레코드판을 보지 않고서도 하이휏츠가 혼자서 연주하는 것, 시케티와 후렛슈가 한 것, 그리고 에르만과 진바 리스트가 연주한 것을 구별해 냅니다. 악보를 볼 줄 몰라도 음악이 좋아서 음악을 오래 들은 귀는 어느덧 잘 훈련된 영리한 개처럼 음이 풍기는 내음을 맡는 코와 음이 발산하는 빛깔을 보는 눈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시가 좋아서 시를 많이 보고 오래 본 눈은 어느덧 잘 훈련되어 있어서 혼돈한 안개 속에서 감추어져 있는 시의 빛깔과 소리와 내음을 식별 감지할 수 있는 코와 귀와 그리고 또 하나의 동공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즉 시의 ‘경이의 경지’에 이르는 운동 능력을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라는.
전봉건에게 시는 이미지를 발사하는 일이고, 언어를 정밀하게 선택하거나 째여지게 하는 일이다. 또 그 이상으로 중요한 시의 기능은 “우리의 의식을 미지의, 상상의, 그 새로운 세계로 해방시켜주는 일”이라고 못 박아 둔다.
책표지 꺼풀 그림은 따로 이름이 적시되어 있지 않지만 동화적 느낌의 그림을 많이 그렸던 파울 클레(paul klee)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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