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기만, 『씨 뿌린 사람들』, 사조사, 1959.
백기만, 『씨 뿌린 사람들』, 사조사, 1959.
1959년 1월 백기만은 누가 읽어도 많은 영양소를 얻을 수 있는 글이라며 자신하면서, 대구 경북권 예술가들의 삶을 다룬 『씨 뿌린 사람들』을 출간한다. 백기만은 이미 『상화와 고월』(1951)을 써서 이상화와 이장희의 삶이 세상에 오래 남을 수 있도록 기록해둔 장본인이다. 동향의 현진건, 이상화, 이장희 그리고 이들과 교류했던 오상순, 양주동 등과 두루 친분이 있었던 인물이며, 평전도 쓰고 시도 남겼지만 생전에 자신의 시를 시집으로 엮지 못했다.
『씨 뿌린 사람들』에 언급된 10명의 주인공들은 시인, 소설가, 화가, 음악가, 영화감독을 망라하는데 실제 백기만은 현진건에 대해서만 글을 쓰고 나머지는 고인과 가까웠던 인물의 글을 발췌해서 실었기에 앞서 『상화와 고월』 내용과도 겹치진 않는다. 하나하나의 글 내용이 상당 수준으로 구체성을 갖고 있는 걸 확인하면서 백기만이 편집자로서도 출중하다는 생각이 든다.
공부 삼아 예술가 별로 흥미로웠던 몇 장면을 옮겨본다.
1. 현진건 편, 빙허의 생애(백기만)
- 백기만은 현진건의 서울 관훈동 시절 일 년 동안 얹혀 지낼 정도로 가까웠다. 백기만은 그를 장안 삼대 미남자로 꼽기도 한다. 다른 두 명은 누군지 밝히지 않았다. 주당 1급으로는 현진건과 함께 염상섭, 오상순, 변영로, 양주동, 나도향을 꼽았다. 현진건은 딸이 하나 있는데 상화의 주선으로 박종화의 아들과 혼인한다. 일제에 협조하지 않았던 지사인 현진건은 사십사 세로 요절한다.
2. 이상화 편, 상화의 전기(이설주)
- <백조> 창간호에 실은 「나의 침실로」는 18세 때 쓴 시라고 한다. 상화가 기생들과 술로 세월을 허비하던 시절이 있었으나, 이설주는 이를 일제에 대한 자조적인 무언의 항거라고 보았다. 아버지를 네 살 때 잃은 상화는 우현서루를 세워 민족교육을 한 백부 이일우의 영향 아래 자랐으며 서울중앙고등학교 재학 시절, 야구 3루수로 활약하기도 한다. 대구로 돌아온 이상화는 3.1운동 시, 친구 백기만과 함께 학생운동을 주도하다가 서울로 유학 가 있던 박태원(성악가)의 집에 피신해 있기도 했다.
그의 시 「이별」은 동경 유학시절 만난 함흥 출신 유보화와의 사랑을 배경에 두고 있다. 상화의 사랑방(현재, 대구 라일락뜨락)은 독립운동지사, 사회주의자들이 늘상 출입하던 장소다.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형 상정을 만나러 상해에 가는 길에 대련에서 이설주와 만나 회포를 푼다. 우현서루의 후신인 교남학교(대륜학교)에서 영어와 작문을 무보수로 가르치기도 하다가, 피압박민족은 주먹이라도 굵어야 한다면 학생들에게 권투를 가르치기도 했다. 현진건과 같은 날 요절한다.
3. 이장희 편, 낙월 애상(양주동)
- 양주동이 보는 이장희는 수줍어하는 성격과 결벽증으로 비사교적인 성격이었고 나중엔 신경쇠약이 심해졌다. 둘은 예술지상주의 예술관으로 의기투합하고 양주동이 서울에서 <금성>을 간행할 때 밤낮으로 그의 숙소를 찾아와 환담하는 등 가까이 지냈다. 이장희가 그리워하던 동경의 M이란 여성은 이장희가 만들어낸 이상적 대상으로 예술적 영감의 원천으로 삼았던 게 아닐까 추측한다. 양주동은 “시인 이장희 군의 예술은 결국 남을 대로 남을 것이요, 오직 아는 자라야 알 것이요, 아낄 이라야 아낄 것이다”고 했는데 미발표 원고를 잃어버린 게 유감이다.
4. 이육사 편, 육사소전(이은상) / 육사의 일대기(홍영의)
- 홍영의 글에 따르면, 육사 3형제는 1926년 조선은행 폭탄사건에 연좌되어 3년 간 옥고를 치른다. 경찰서 유치장과 형무소 감방을 출입하는 기록을 27회로 소개해 두었다. 일제 고등형사의 감시의 눈이 늘 따라와 지인을 만나거나 벗을 사귀기 어려웠고 대신 대구에 있던 육사 3형제끼리 차나 술을 마시곤 했다.
육사의 수필 「산사기」를 인용해두었는데, “여행이란 이유가 필요하다면 그것은 여행이 아니고 사무인 까닭이다.”에 이어 “계획을 한다거나 결의를 한다면 벌써 여정은 사라지고 마는 것이니까, 한 번 척 느꼈을 때는 출발이다.”고 했다. 육사가 시대를 잘 만났다면, 마음과 발길에 정처를 두지 않는 낭만적 여행자로 살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
이후로도,
5. 오일도 편, 제곡일도문(권영철)
6. 백신애 편, 백신애 여사의 전기(이윤수)
7. 박태원 편, 악단의 선구자 태원(김성도) / 사백의 추억(박태준)
8. 김유영 편, 김유영의 생활연보(이형우)
9. 이인성 편, 이인성의 생애와 작품(이원식)
10. 김용조 편, 화백 김용조의 전기(최해룡)
이렇게 이어지는 예술가에 대한 기록들이 다 소중하게 느껴진다. 김용조 화가는 네댓 살 위의 이인성과 함께 서동진의 ‘대구미술사’ 생활을 거쳤으며 그림에 천재적 재능을 보였다. 수창초를 다니던 이인성을 이영희 선생이 격려한 내용, 달성초에 다니던 김용조를 이응창 선생이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이야기도 눈에 띈다.
김용조는 물감을 다 쓰고 나면 다음 그림을 시작 못할 걱정에 당장의 그림을 마무리 짓지 못할 만큼 가난했다. 이응창의 도움으로 조양회관(달성공원 앞에 있었으나 현재 망우공원에 옮겨놓음) 2층에 화실을 내고 작업하는 풍경 한 대목은 먹먹한 여운을 남긴다.
“실내가 좁고 거리가 길지 못해서 그림을 멀리서 바라보고 제작하기가 곤란하므로 그 그림을 가지고 밖에 나와서 지금 조양회관 후문인 본관 벽에다 기대놓고 점점 뒷걸음질을 치면서 일보 일보 뒤로 물러서는데 갑자기 바람이 세워논 그림이 그만 앞으로 자빠지자 이어 달려가서 엎어진 것을 뒤쳐보니 흙과 먼지가 화면에 잔뜩 묻어 그야말로 엉망이 되어 버렸다.
잠시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던 김군(김용조)은 주위에 우리들이 있는 것도 개의하지 않고 갑자기 목놓아 우는 것이었다.”
글쓴 최해룡은 이 대목에서 화가에 대한 존경과 연민의 마음을 갖는데 나 또한 그런 마음이다. 김용조는 서른을 채 못 살고 요절한다.
시인은 씨 뿌리는 사람이고 모든 예술가들은 시인으로 귀착한다고 백기만은 말한다. 이들의 이야기를 알뜰하게 모아서 전하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백기만 시인은 씨 뿌린 사람들의 한 페이지로 남을 게 분명하다. (이동훈)
*사진의 책은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제공되는 원문 서비스로 다운받아 철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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