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밥 무덤 / 허정

톰소여와허크 2021. 11. 26. 16:41

밥 무덤 / 허정

 

 

단칸방 아랫목에 우묵한 무덤이 있었습니다

비단 보자기를 한 겹 벗기면

백양목 기저귀 같은 강보를 다시 한 겹 벗겨내면

그 속에 사기 밥그릇 한 개가 작은 꿀단지처럼 떡하니 있었습니다

우리 집 장남인 큰 형이 택시를 몰다 밥 먹으러 올 때면

엄마는 조심스레 비단 보자기와 강보를 풀었습니다

밥뚜껑을 열면 송글송글 더운 땀이 맺힌 밥알들이 고개를 쏙 내밀었습니다

밥그릇이 있던 아랫목 장판은

까맣게 탄 누룽지 같은 지도가 그려져 있었습니다

칠순이 넘은 큰형은 골프장 야간 경비를 나가고 있습니다

큰형의 푸른 잔디밭에 어머니의 발자국은 애초에 없었습니다

단지 순찰 코스에는 오목한 밥 무덤이 잔디 풀에 숨겨져 있습니다

엄마의 따스한 밥공기가 빠져나간 밥 무덤에

골프공 같은 흰 달빛만 밥숟가락처럼 들락날락합니다

 

-『아보카도 나무가 있는 정원, 한국문연, 2021.

 

 

감상 : 경남 남해엔 동제나 당산제를 지낸 후 마을 한 쪽에 제삿밥을 묻어두는 밥무덤이 지금도 남아있지만, 시인이 말하는 밥 무덤은 좀 더 소박하다. 보온밥솥이 없던 시절, 밥이 차지 않도록 이불이나 포대기로 감싸고 보자기로 덮어놓은 밥공기 자체가 밥 무덤이다.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밥무덤이나 자식의 따뜻한 한 끼를 바라는 어머니의 밥 무덤은 둘 다 기도하는 마음을 담고 있다. 그럼에도 어머니 입장에선 귀신 대접보다는 눈앞의 자식에 더 맘이 쓰이긴 했을 것이다.

어머니가 데워 준 밥으로 노동의 피로를 잠시 잊던 큰형은 칠순이 넘어도 일을 놓지 못한다. 누군 골프장 푸른 잔디밭을 밟는 여유를 누리기도 하지만 어머니와 큰형은 그런 여유와는 거리가 먼 인생이다. 야간 경비인 큰형은 골프채 대신 랜턴을 잡고 골프장 주변을 살피는 중에 무덤 봉분을 지났을 것이고, 이를 상상하는 시인의 눈엔 그 옛날 어머니가 챙겨준 밥 무덤이 아른거린다.

큰형에게 향했던 어머니 사랑은 또 다른 방식으로 시인과 형제들에게 두루 미쳤을 것이다. 시인은 그런 어머니의 사랑을 되갚지 못하고 통절해하는 시편들을 쓰기도 했다. 시인만 그럴까. 밥만 먹을 줄 알았지 그 밥이 어떤 밥인지 오래 생각지 않는 우리는.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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