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책)

<소설> 남극해

톰소여와허크 2022. 2. 23. 15:53

이윤길, 남극해, 신생, 2020.

 

 

- 허먼 멜빌의 피쿼드 호가 대서양에서 출발하여 태평양까지 흰머리 향유고래 모비 딕을 추격했다면 이윤길의 피닉스 호는 남극해까지 나아가서 남극이빨고기를 잡는다. 피쿼드 호의 선장 에이 해브는 만선의 꿈보다는 복수심과 전의를 불태우며 모비 딕과 마주하는 결정적 순간을 맞이하게 되고, 피닉스 호의 강 사장과 장 선장은 만선을 꿈꾸고 그 꿈 실현 직전까지 이른다.

피쿼드 호는 백인에게 몰살당한 원주민 부족의 이름에서 빌렸는데 흰고래로부터 난파당하는 운명을 피하지 못한다. 피닉스 호는 불사조(不死鳥) 혹은 불새의 이미지를 띠는 데 소설의 결말을 보면 이름과 반어가 되는 면도 있고 동일시되는 면도 있다.

소설은 박 기관장의 시선을 따라간다. 작가는 파국의 조짐을 치밀하게 짜둔다. 남극해의 추위와 파도, 빙하와 유빙 등 자연적 재해와 그 위험의 정도를 긴장감 있게 서술하지만 대개의 문제는 내부에서 생긴다는 속설이 이 소설에도 적용된다. 자기 기준에서 벗어나는 것을 수용하지 못하는 이기적 인물, 그런 인물을 참지 못하는 또 다른 유형의 인물이 사건의 빌미가 된다. 선상 살인과 업무 조정 그로 인한 등장인물의 과로가 겹치면서 불운한 사건이 순식간에 피닉스를 잠식하게 된다.

작가는 항해 경험과 해상 관련 지식이 풍부하다. 소설에 현실감을 불어넣고 몰입감을 가져오는 것도 이런 경험이 문체를 통해서 밀도 있게 드러났기 때문일 것이다. 해양 장편소설로 분류되는 이 소설은 대개의 해양 소설이 그러하듯 모험과 낭만의 요소도 상당하다. 현실에 매이지 않고 꿈꾸는 듯한 태도를 낭만이라고 얘기하지만 그보다는 때 묻지 않은 순정함이 바탕에 있을 때 낭만에 가까워지리라 생각한다. 이런 맥락에서 바다는 뱃사람들의 살아가는 무대이며 순정한 땀방울이 철썩되는 곳이며 가짜는 끼어들 수가 없는 신성한 곳이다라는 박 기관장의 독백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작가의 낭만을 엿볼 수 있다.

작가는 소설과 함께 시집도 몇 권 냈다.

피닉스 호가 지나가자 주먹보다 조금 큰 얼음조각과 그보다 더 큰 얼음조각들이 생뚱맞게 둥글둥글거리며 흘수선을 따라서 선미 쪽으로 흘러갔다 얼음조각들은 마치 모네의 구름 속 수련같이, 남극해에 피어 있는 얼음꽃처럼 보였다. 썰물 때의 빨강처럼 검푸르고 불투명한 물길도 보였는데 시퍼렇게 갈라지는 물이랑은 피닉스 호가 지나가자 겹겹이 물결치듯 얼음조각들이 모여들면서 사라졌다.”

인용한 문장은 묘사의 힘을 잘 보여준 산문이면서도 시적으로 읽힌다. 희미해지는 피쿼드 호의 기억 위로 피닉스 호의 무게를 얹어 본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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