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이 만, 『에펠탑의 검은 고양이』, 한길사. 2000.
자작곡 가수에다 비디오 제작자며 소설까지 쓰게 된 작가는 에릭 샤티의 음악이 자신의 현재 모습에 영향을 많이 주었다고 했다. <짐노페디>, <그노시엔>, <벡사시옹>은 샤티가 20대에 작곡한 피아노곡인데 그 무렵의 샤티를 알 만한 자료는 많지 않다고도 했다.
샤티의 임종 후 한때의 연인이었던 수잔 발라동에게 남긴 편지 한 다발이 그의 방에서 발견되었지만 수잔 발라동은 그 편지를 모두 태워버렸다. 샤티를 좀 더 잘 알 수 있는 기회가 사라진 것이다. 샤티와, 수잔과, 수잔의 아들 위트릴로가 함께 찍은 사진도 편지와 함께 전달되었지만 수잔 발라동은 그 사진에서 샤티가 있는 부분만 오려낸다. 샤티와 수잔 발라동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작가는 제한된 자료에 상상력을 동원해서 샤티의 삶을 재현해 놓았다. 항구도시 옹플뢰르 출신 샤티는 여섯 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조모 밑에서 자랐지만 조모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음악원에 가서 일 년 만에 자퇴하고, 군대에 지원해서 갔지만 또 일 년 만에 병역 부적격자 판정을 받고 제대한다. 샤티에게 일자리를 내준 것은 몽마르트다.
에드거 앨런 포를 좋아했던 보들레르가 『검은 고양이』를 번역해 놓자, 샤티도 그 소설에 매료된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사관학교를 중퇴한 포의 이력도 영향을 주었는지 모른다. 운명처럼 몽마르트 카바레 ‘르 샤 누아(검은 고양이)’에서 피아노 연주를 담당하게 된다. 검은 중산모, 검은 벨벳 윗도리와 바지, 검은 고양이 손잡이가 달린 검은 박쥐우산을 지니고 몽마르트를 걷는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생겨나는 순간이다.
샤티는 수잔 발라동과 6개월 사귀고 얼마간 동거도 한다. 소설 속에서는 샤티가 수잔 발라동에게서 어머니 모습을 발견하고 그 후로 성생활을 할 수 없었기에 다른 남자를 만나 수잔이 그를 떠나는 것으로 나온다. 샤티와 수잔의 관계를 알고 있는 사람의 증언이나 기록이 있었다면 모르겠지만(사실 주위의 증언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 진위가 명백해지는 건 아니다) 결별 이유가 쉽게 수긍 되지 않는다. 현재 인터넷 검색창에도 이와 같은 결별 이유가 공공연한 사실인 양 떠돌고 있지만 샤티를 소재로 이 소설의 영향일 가능성이 크다. 수잔이 떠나고도 샤티가 수잔에 대한 애정을 끝까지 간직한 점, 샤티가 남긴 편지와 사진에 대해 수잔이 보인 반응을 생각하면 둘의 관계와 감정은 소설에서 묘사한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미묘한 뭔가가 있다는 생각이다.
작가 목소리와 샤티 목소리가 일치하는 느낌을 받은 것은 장미십자단 관련 부분이다. 장미십자단은 비밀스런 신비주의 종교 조직으로 당시까지도 상당한 영향력이 있었다. 샤티는 장미십자단의 공인 작곡가가 되어 그곳 대종사로부터 행사 음악을 바그너 풍으로 작곡해달라는 주문을 받는다. 샤티는 이에 따르지 않고 자신만의 음악을 선보이고 대종사와 대립하다가 공개 절연장을 쓰게 된다. 대종사든 바그너든 자신이 누군가의 제자로 인식되는 분위기를 참을 수 없다는 게 절연장 내용이다. 소설에서는 이 사실을 바탕으로 대종사와 한바탕 설전을 벌이는 대목이 나온다.
“예술이 예술인 까닭이 무엇인가? 그건 바로 독창성입니다. 그 이외에는 있을 수 없어요. 그 이외의 것은 부록에 불과합니다. 군더더기에 불과합니다. 요컨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아무래도 좋은 것에 불과합니다. 아시겠습니까? 불필요한 것, 쓸데없는 군더더기를 하나하나 정성껏 제거해가는 겁니다. 그러면 언젠가는 진실이 나타나겠지요. 그럼 진실이란 무엇인가? 그게 독창성입니다. 이미 있는 것을 부정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세상에 없는 것을 새롭게 제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따라서 진정한 예술가는 절대로 남을 흉내내지 않습니다.”
작가 아라이 만이 읽은 샤티의 예술혼이요, 그런 정신을 지향하는 작가자신의 태도를 집약해 놓은 것이 아닐 수 없다. (이동훈)
'감상글(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에세이> 고향집 앞에서 (0) | 2022.03.06 |
---|---|
<소설> 남극해 (0) | 2022.02.23 |
<산문집>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 (0) | 2022.01.27 |
<산문집> 단풍객잔 (0) | 2022.01.24 |
<에세이> 로트렉, 몽마르트르의 빨간 풍차 (0) | 2022.01.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