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책)

<에세이> 꿈꾸고 사랑했네 해처럼 맑게

톰소여와허크 2023. 4. 8. 00:18

 
 
전영애, 『꿈꾸고 사랑했네 해처럼 맑게』, 문학동네, 2021.
- 내겐 독일 문학 번역자로 우선 기억되는 저자의 이번 책을 읽으니 저자에 대한 궁금증이 더 생긴다. 마침 유튜브에 <다큐 인사이트: 인생정원- 일흔 둘 여백의 뜰>이 올라와 있어서 흥미롭게 시청했다. 영상은 책 읽기 전이든 후든 아무 때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꿈꾸고 사랑했네 해처럼 맑게』는 괴테의 시구에서 제목을 빌린 책이다. 저자가 운영하는 여백 서원, 그 뒷길엔 괴테의 시가 푯말을 대신하고 있고 그 꼭대기 어디쯤에 시비가 있다. 시비엔 “시간이 나의 재산/ 내 경작지는 시간”이란 시구가 적혀 있다. 저자는 젊은이들이 시간이란 어마어마한 상속분을 마음껏 경작하기를 빌어준다. 『파우스트』를 60년 동안 썼던 괴테가 바로 그런 사람임을 얘기한다. 소개한 괴테의 여러 시구 중에 “나를 행복하게 놔두지 않으려거든/ 근심이여, 이제 나를 현명하게나 해다오”라는 구절 앞에서 저자는 멈추어 선다.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은 게 근심이지만 근심이 사람에게 깊이를 주는 역설을 괴테는 이해했고, 괴테를 공부하는 저자도 이를 인용할 때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충당하던 대학 시절, 믿었던 조교 자리마저 양보하거나 양보당하면서 의기소침했던 저자가 어떻게 해서 괴테 연구자까지 될 수 있었는지 그 드라마틱한 과정도 책에 소개되고 있다. 저자가 오랫동안 공을 들여 번역했다는 『서·동 시집』에 대한 이야기도 작품 안팎으로 극적인 요소가 많다. 괴테 박물관에서 이 시집에 대한 저자 강연이 있었고, 이것이 인연이 되어 사람들을 만나고 다른 가정에 초대되어 가기도 한다. 그곳에서 그렇게 찾고 싶었다는 ‘스승’을 만나게도 된다.
저자가 따르는 스승 중의 한 분은 라이너 쿤체 시인이다. “그게 어떤 건지, 내가 안다/ 남들과 발맞출 수 없다는 것” (「뒤처진 새」 중)이란 시구는 저자의 어둔 마음을 읽어 주며 라이너 쿤체 시인이 직접 보내온 것이다. 뒤처진 것, 슬픈 것에 마음과 힘을 보태는 것이 스승의 도리 같기도 하다. 저자의 여백 서원 방문객 중엔 둘의 관계를 알고 일부러 라이너 쿤체의 시에 등장하는 은엉겅퀴 씨를 구해 온 사람도 있으니 인연이 또 다른 인연을 부르는 귀한 장면 같아서 관련 시도 찾아보게 된다.
뒤로 물러서 있기
땅에 몸을 대고
남에게
그림자 드리우지 않기
남들의 그림자 속에서
빛나기
-「은엉겅퀴」 전문
여백 서원은 한 달에 한 번 개방한단다. 제자들이 찾는 날이기도 하다. 저자인 전영애 선생은 제자들에게 책 읽고 글 쓰는 일로 모범을 보인다. 여백 서원에 나무를 심고 나무를 가꾸는 일로도 분주하다. 쉼 없이 공부하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던 괴테. 그런 괴테를 공부하고 파울 첼란과 라이너 쿤체까지 받아들이는 저자의 삶도 괴테의 시간만큼이나 부지런하다.
『파우스트』에 나오는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는 문장은 저자에 의해서, “인간은 지향이 있는 한 방황한다”로 수정된다. “지향이 있다는 것은 갈 곳이 있고 목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표가 있는 한 방황한다니. 갈 곳이 있기에 길을 잃는다니. 그러나 이 비문(非文)의 함의가 참 큽니다. 뒤집어보면 지금 길을 잃고 방황하는 것은 곧 갈 곳이, 목표가 있다는 이야기일 수 있는 것입니다”라며 생각을 덧붙인다. 마치 괴테와의 대화를 독자와의 대화로 옮겨놓은 듯한 느낌이다. 또 누군가는 방황 자체가 지향을 찾는 ‘길 찾기’란 말도 할 것이니 지향을 모르는, 지향이 없는 방황에도 따스한 시선이 있기를.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