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놀이 / 나문석
극락강을 건너온 눈바람이
온 누리 하얗게 칠하는데
창가에 선 백발의 어머니, 밤새도록
돌아가신 아버지를 기다린다
누워서 기다려도 오신다고 했지만
소용이 없다
지나가는 기차소리에
놀란 눈으로
통근열차 놓치면
작업반장한테 혼난다고
안달하는 어머니
도시락 가방을 챙겨 들고 기어이
방문을 나서려고 한다.
동이 트려는지
창밖이 밝아지기 시작하는데
태어나기도 전의 날들이
굵은 눈발이 되어
허공을 가득 채우고
울 엄니 내일 아침에 시집간다고
새색시 화장을 시작한다
* 영산강과 황룡강의 분기점에서부터 광주천이 나누어지는 지점까지를 극락강이라 부른다.
-『정삼각형 가족』, 시와에세이, 2014.
감상 – 시인의 아버지 나경일 선생은 제일모직 노조 설립과 운영에 애쓰다가 고초를 겪었던 노동자이자 노동 운동가다. 1974년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연루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실제 8년 이상을 복역했다. 나문석 시인의 고등학교 재학 시절의 일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 대신 직장을 다니며 가계를 책임지느라 피로에 시달리는 중에도 아버지 면회를 부지런히 다니신다. “칠팔십 년대 서대문, 광주, 전주로/ 유신의 초행길 물어물어/ 남편 면회하러 잘도 다니시더니/ 이제 문밖에만 서도/ 당신의 집을 찾지 못한다”(「어머니의 내비게이션」)고 하니, 어머니를 지나간 세월의 무게가 종국에는 어머니의 정신마저 조금씩 흩뜨려놓은 걸 짐작할 수 있다.
가장의 부재가 나머지 가족에게 드리운 그늘은 얼마만한 것일까. 그것도 반공이 국가 이념인 사회에서 간첩 혐의를 받는 자의 가족으로 산다는 건 형언하기 어려운 고통의 길이었을 것이다. 1981년 연좌제가 폐지되고, 이듬해 나경일 선생이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하더라도 국가의 감시, 사회의 홀대와 불이익은 늘 따라다니는 굴레였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부터 32년이 지난 2007년에 이르러서야 이 사건에 대한 재심이 이루어졌다. 재심 결과 사형당한 8인에 대한 무죄 선고가 있었다. 고문에 의한 사건 조작을 인정한 것이다. 징역형을 선고받은 사람들에 대한 무죄 선고도 이어졌다. 인혁당 당사자와 가족들은 2009년 국가배상금을 받았지만 이어지는 대법원 선고에서 배상금 계산이 잘못되었다며 절반 가까이 환불할 것을 요구받았다. 여기에 지연 이자까지 더해지면서 보상 원금보다 많은 반환금을 내야 할 가계가 생겼고, 정부는 강제 경매 조치를 통해서 이를 받아내기까지 했다.
앞서 인혁당 재건위 사건과 그 처리를 사법 살인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곤 한다, 끔찍하게 고문당하고, 억울하게 옥살이하고, 가족까지 핍박받고 살아야 했던 그간의 세월에 대한 보상과 대우가 전자계산기와 돈 액수로 가늠될 수 있는 것인지도 의문이지만 주었던 돈을 소송까지 해가며 다시 떼어가는,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날강도나 하는 짓을 국가가 버젓이 행하는 것 아니냐는 성토도 없지 않았다. 그나마 이자 면제라도 결정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2022년 들어선 보수정권의 공으로 돌아갔다.
나경일 선생은 암 투병 끝에 2010년 사망했으니 보상금 반환 조치를 알지 못하고 가셨지만 나문석 시인 가족의 불행은 이어지고 있다. 남편을 뒷바라지했던 어머니가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기 시작하고, 수술비 등으로 써버린 보상금의 반환 조치에 시달리다가 시인의 누님은 강제 경매로 집을 잃기까지 했다는 기사가 검색이 된다.
시인의 마음은 시집 『정삼각형 가족』의 서시 격인 「희망에게」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시간이야/ 물 흐르듯 잘도 가더니만/ 세상의 맑은 아침은/ 반세기 지나도록 오지 않아/ 이제는/ 내가 너를 버린다/ 아!/ 부질없었던 그동안의/ 인고여”라는 육성에서 시대와 맞물린 한 생의 아픔을 읽게 된다.
어머니의 근황을 전하는 시가 「유령놀이」란 제목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희망이 아니라 희망 고문으로 점철된 이러한 상황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유령놀이」의 ‘유령’은 지금 이 공간을 떠나,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공간과 시간을 사는 어머니와 어머니 눈에 비친 아버지 모습과 관련되는 제목이다. 또한, 반세기 지나도록 오지 않는 세상의 맑은 아침처럼 한 가족이 반세기 동안 겪었을 고통도 현실의 일로 믿기지 않았을 것도 같다. 더 나은 세상을 고민하는 것에 죄를 묻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할 것인데 없는 죄까지 덧씌워 망신을 주고 징벌을 가하는 인간세상 아닌가. 유령놀이는 그로 인한 피해를 슬프게 웃는 극일 수도 있겠다. 만약, 유령이 있다면 인간 사회의 일이 유령 사회로 옮겨올까 봐 유령도 걱정일 거란 생각이 스리슬쩍 지나간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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