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봄비 / 이은새

톰소여와허크 2023. 10. 31. 16:21

봄비 / 이은새

 

 

화분에 물을 주듯 비가 온다

물에 빠진 붓이 몸을 털어내듯

봄비가 온다

 

아다지오로 분무질을 시작한 하늘

바람의 마음을 타면서 방향 감각을 잃고

그렇지만 세심한 줄기로 내린다

 

어둠 속 보이지 않던 먹구름들

힘을 키우기 위한 세력이었으니

 

바닥을 구르다 보면 너, 나 할 것 없이

천사의 탈을 쓴 악마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희뿌연 하늘이 내게 보낸 경고의 메시지,

마음을 두드리면 밑바닥까지 스며든 빗방울들

하나가 되기 위한 준비된 장난이었으면 했다

 

참새 눈물만큼 인색하던 시간도 제 갈 길 가고

언제나 그랬듯이 비 갠 후의 청명한 하늘은

더욱 경쾌함에 신경 쓸 것이리라

 

웅덩이에 응달진 눈물, 그 자리가 아직 남아 있다면

햇살 쨍쨍한 날

마음을 모두 내려놓아도 좋으리

달아나는 너를

애써 붙잡고 싶지 않은,

 

-『파일을 압축하다, 두엄, 2023.

 

 

감상 이은재 시인의 두번 째 시집이다. 서시 격인 그림자에서 어머니의 지나간 근심 자리 / 내 액운의 색깔처럼 아마 울음이 남기고 간 / 뒷걸음질이 아니었을까라며 자신을 그림자와 동일시하는 듯한 태도를 취한다. 시인의 성장환경 일부나마 짐작해보게 되는 구절이다.

하지만 시인은 그림자에서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어둠이기도 하고 빛이기도 한 그림자의 양면을 통합하는 감정을 내보인다. 그런 감정의 원천은 시인의 경험과 깨달음에서 오는 것이겠지만 시인의 말에 언급된 것처럼 꽃이 되어준 가족이 옆에 있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봄비그림자의 연장선상에 놓인 작품으로 보인다. “화분에 물을 주듯생명력을 불어넣으며 세심하게 내리는 비인가 싶다가도 어느새 먹구름이 힘을 키워가면서 어두운 국면을 연출하게 된다. “천사의 탈을 쓴 악마란 표현까지 고른 것을 보면 시인이 인간관계에서 얼마만 한 상심을 겪었을지 짐작이 된다. 봄비를 대하며 빛으로 다가온 일들, 낭만의 감성을 일깨워 주던 일이 생각나는가 하면 그런 일들이 역으로 더 큰 실망을 안겨주는 일로 바뀌어 혼란과 수습의 시간을 지나오게 한 것이리라 싶은 것이다.

봄비가 오고 그치고 또 계절이 몇 번 바뀌어 가는 동안, 시인은 마음을 더 내려놓고자 한다. “달아나는 너를 / 애써 붙잡고 싶지 않은마음은 당면 현실을 부득불 몰려온 상황으로 두지 않고 자신의 선택으로 두고 싶은 시인의 자존심으로도 읽힌다.

그림자는 실체의 한 부분이니 사라질 리 없다. 햇빛과 시간에 말라가는 응달진 눈물의 자국도 말끔하진 않을 것이다. 이 한 편의 시가 그 흔적과 같아서 반짝 빛을 낸다. 맑으면서도 쓸쓸한 눈부심이다. (이동훈)

'감상글(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산에서 2/ 한성기  (0) 2024.01.04
파라솔 / 김재진  (0) 2023.11.12
병꽃나무를 들이다 / 이비단모래  (0) 2023.10.25
하일시초 / 신동집  (0) 2023.10.22
독작 / 나석중  (0) 2023.10.01